<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언젠가 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학교에서 보았습니다. 몇몇 장면들만 기억이 나는 애매한 영화였던 그 영화가 후에 대단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척 유명한 스튜디오의 유명한 거장이 만든 역작. 대중과 평단 모두의 극찬을 받은 작품. 그래서 저는 언젠가 이 영화를 다시 보기로 마음먹었고, 최근에 보게 되었습니다. 재미있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생각이 강렬하게 남지는 않았습니다. 환경보호, 사물의 존재와 이름, 남녀의 사랑, 서로의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가 이리저리 섞여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민하던 중에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닛폰 TV 영화부에서 지브리를 담당하고 있는 오쿠다 세이지의 딸인 치아키를 위해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죠. 생각이 말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린 여자아이를 위한 영화. 치히로의 행적은 60에 들어선 할아버지가 친한 집의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던 것이죠. 물론 할아버지가 살아온 삶이 있으니 사회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 같은 것이 들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이하고 싶은 이야기의 본질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치히로의 행적을 찾아야 합니다.
치히로의 삶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닥뜨립니다. 부모님은 돼지로 변하고, 자신을 먹거나 죽이려는 다양한 신들이 있는 세계에 홀로 남겨집니다. 부모님을 구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 나온 자신의 의지와 몇몇 등장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일을 얻은 치히로는 여전히 어리바리합니다. 어수룩한 아이를 기다려줄 만큼 목욕탕은 여유롭지 않습니다. 텃세도 견뎌내야 하죠. 그 텃세를 견디며 치히로는 위기를 해결하고, 조금씩 다부진 아이로 변해갑니다. 이야기의 중반이 넘어서면 망설이는 아이의 모습은 없습니다. 자신이 들여보낸 가오나시를 원래대로 되돌려 목욕탕 밖으로 데려가고, 사랑하는 하쿠를 구합니다. 자신의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뚝심 있게 해내는 치히로의 모습은 마치 어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구해 밖으로 나가는 치히로의 모습에선 신들의 세계에 처음 들어올 때처럼 부모님에게 기대는 아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시는 겪지 못할 신비한 경험은 치히로의 기억과 마음속에 남아 갈고 어두운 삶의 길을 비춰주는 하나의 등불이 될 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한 아이의 짧은 성장 이야기를 써내면서 이 영화를 볼 아이에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수한 위기가 닥쳐오고, 어느 순간에는 그 위기가 너무 커서 어찌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혼자서는 매서운 북풍 매몰차게 몰려오는 절벽의 낭떠러지에 간신히 서 있는 것 같고, 너무 크고 두꺼운 벽이 앞에 있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겁니다. 그 순간 누군가 북풍을 앞에서 막아주며 팔을 끌어당겨 위험한 낭떠러지를 벗어나게 해줄 것이고, 혼자서는 넘거나 부술 수 없을 것 같던 벽을 힘을 모아 부수거나 넘게 해줄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여전히 의지를 품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이죠. 그렇게 마음속에 강렬한 의지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면 어느새 자신이 이전보다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하여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면 누군가를 낭떠러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벽을 넘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 여유 또한 생기겠죠. 그런 삶이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감독이자, 이웃의 할아버지는 말하고 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나왔을 때 홍보팀에서는 ‘살아갈 힘을 깨워라!’라는 문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숨을 쉬기만 하고, 이 세상에 있다고 해서 ‘산다.’라는 말을 붙이기는 힘들 겁니다. 도전하고 실패하고, 실패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 노력하는 이들에게 ‘산다.’라는 말을 붙일 수 있겠죠. 치히로가 위기와 극복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힘을 얻고,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에 잘 맞는 캐치프레이즈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치아키는 과연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한 아이의 성장드라마에 여러 가지 철학과 사회문제, 일본문화를 잘 녹여낸 이 영화는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미국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등등을 수상했습니다. 한 아이의 성장드라마와 러브스토리는 대중들의 마음도 빼앗아 지브리 스튜디오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평단과 대중을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삶은 치아키의 마음에 오래 남아 어른이 되어 삶을 헤쳐나갈 때 큰 힘을 줄 수도 있지만, 당장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치아키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할 만한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평은 사실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치아키는 이런 평을 내놓았습니다. “재미있었어요!” 이 말을 듣고 프로듀서인 스즈키 도시오와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매우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재밌는 영화는 아마 치아키의 삶에 오래 남아 그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오래도록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그런 영화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