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ekja Dec 11. 2023

안정적인 가짜보단 알 수 없는 진짜를 찾아서

트루먼 쇼

 친구와 술을 먹었습니다. 대학 입학 이후 늘 같이 술을 먹어 온 친구입니다. 의견은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 친구이기에 제 생각을 마구 쏟을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러다 요즘 얘기가 나왔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트루먼 쇼>를 봤다고 말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늘어놓는데 그가 가만히 듣다가 이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트루먼은 밖으로 나가서 행복했을까? 다시 돌아오진 않았을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트루먼은 나가서 행복했을 거야. 그리고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트루먼은 다시 돌아왔을 거야.


 이 의견의 대립은 영화 마지막에 나옵니다. 감독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을 세계, 그러니까 스튜디오의 경계에서 세계 안으로 되돌리려고 트루먼을 설득합니다. 밖은 트루먼을 속이는 사람이 가득하고 위험하다고. 이 말을 듣고 별말이 없는 트루먼에게 감독은 이런 말을 던집니다. “생방송이야! 뭔 말이라도 해보라고!” 그러자 트루먼은 처음 등장했을 때 했던 인사를 그대로 건넵니다. “오늘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인사하죠. 굿애프터눈, 굿이브닝, 굿나이트.” 그리고 카메라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은 당차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영화만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는 행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프의 말처럼 현실은 비정하고 교활하며 냉혹합니다. 크리스토프의 말이 트루먼 쇼를 트루먼에게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것은 현실에 정말로 그런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시간을 돌려 앞으로 갑니다. 트루먼은 누구나 바라는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보험 회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밝고 긍정적인 간호사 부인과 결혼을 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온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는 소꿉친구 또한 있습니다. 집이나 차를 사면서 남은 대출금이 있기는 하지만, 엄청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죠. 많은 이들이 바라는 평온하면서도 즐거운 삶. 하루하루가 무난히 지나기를 바라는 일상의 행복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삶. ‘이 정도의 삶이라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트루먼의 삶을 보면 들기 마련입니다.


 이런 평범함의 이상 같은 삶을 내팽개치고 나온 트루먼은 무엇을 맞닥뜨렸을까요? 사람들의 관심과 환호? 아마 잠시였을 겁니다. 그는 이제 맨몸에서 돈을 벌고, 집을 얻어야 합니다. 그가 만든 모든 경력은 그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던 것이고, 밖의 세계에서 그의 경력은 하나도 의미가 없습니다. 경제적 안정기에 접어든 약 서른의 나이는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힘든 나이죠. 특히 그가 수중에 가진 돈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적어도 대학이라는 경력이 남은 무수히 많은 취준생이 훨씬 나을 겁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트루먼은 그 세계를 나와서 행복할까요? 트루먼이 다시 돌아왔을 것이라는 친구의 의견은 무척 타당한 의견으로 들립니다.


 현실은 합리적이고 냉혹합니다. 하지만, 마냥 합리적이고 냉혹하지만은 않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많은 것들은 돈으로 치환되기 마련이고, 돈이 종종 최우선에 서기도 합니다. 이처럼 돈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은 돈만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해 마냥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돈 이외의 모든 가치를 무시하고 돈을 추구하는 것이 제일이 아니라면서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인간이라면, 인간성 등의 말을 내뱉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트루먼의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돈뿐만이 아닙니다. 따뜻한 인간관계가 안정적으로 구축된 삶이기 때문에 트루먼의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합니다. 돈과 돈이 채워주지 못하는 관계 내에서의 정서적 안정, 이것이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입니다.


 트루먼은 이 관계와 정서가 거짓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진심은 없고 꾸밈과 거짓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고 있던 길에서 조금만 방향을 틀면 주변의 모두가 막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연기였습니다. 그 무엇도 믿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트루먼이 발견한 것은 끝없는 어색함과 위화감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일상은 불편한 반복으로 느껴졌고, 벗어나야 할 상황으로만 보였습니다. 무수한 관계의 거짓을 넘어 진실의 문 앞에 선 그는 잠시 망설입니다. 자신이 알았던 세계 그 밖에 대해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까요.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트루먼이 망설이는 사이 감독은 트루먼에게 말을 겁니다. 너는 대단한 쇼의 주인공이고,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고. 그러자 트루먼은 말합니다. “전부 가짜였군요.” 감독은 대답합니다. “자넨 진짜야.” 이 답은 트루먼을 설득하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사실 이 말은 트루먼을 오히려 밖으로 나아가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짜밖에 없는 삶에서 만들어낸 가짜들과의 관계는 진짜를 만족하게 할 수 없으니까요. 한 세계를 진짜로 알았던 유일한 이는 그 세계를 가짜로 인식해버렸고, 자신을 진짜라고 믿어온 그 사람은 이제 세계 전체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 명의 진짜에 의해 유지되던 세계는 붕괴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 온 모든 세월이 부정당한 그 순간 그는 아마 절대로 이미 자신이 떠남으로써 붕괴한 이 세계에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한 잘 모르는 아저씨와 술을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농담 따먹기나 하던 술자리는 취할수록 조금씩 진지해졌고, 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는 돈이 없어서 전부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조금 여유가 생긴 지금은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물론 돈이 있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곤 하지만, 다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기 힘든 것들. 언어로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 것들. 도덕, 명분, 사랑, 희망 등과 같은 것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마음을 다한 순간에만 얻을 수 있는 가치들이기도 합니다. 트루먼이 밖에 나가서 행복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는 이미 안정적인 ‘가짜’를 버리고 알 수 없는 ‘진짜’의 가치를 향해 나아간 이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의 성장 드라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