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사람다운 삶을 위하여
나, 다니엘 블레이크
근래 한국은 MBTI 천국입니다. 흔히 MZ라 불리는 현 젊은 세대에게 MBTI를 묻는 것은 거의 인사와 같습니다. MBTI에서 성격을 나누는 네 가지 기준 중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판단기능에 관한 기준입니다. 사람의 판단 근거가 이성(T)이냐 감성(F)이냐를 가지고 두 유형으로 사람으로 분류를 하는 것이죠. 특히, 공감 문제에 있어서 T는 사람에게 잘 공감해주지 않고, F는 그런 T에게 공감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하나의 시대의 문화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공감에서 이성과 감성은 모두 중요합니다. 이성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감성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공감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이성과 감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죠. 그 사람의 외부 환경과 내면을 모두 고려하여 그 사람에 대해 동질감을 느끼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공감입니다. F와 T에 관련된 저 말은 사실 F와 T가 모두 자신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죠. 저 말이 많은 이들에게 쓰인다는 상황 자체가 사회 전체에 공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추측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의 부족은 몇몇 개인들에게는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삶을 위협하는 요소로 변하기도 합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시작은 누군가의 절실한 말을 그저 업무로만 처리하는 질병 수당 담당 의료 전문가와 그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의 전화로 시작합니다. 당장 심장에 문제가 있어 일을 더 이상하지 못하는데 전문가는 팔이 머리 위로 움직이냐, 자명종을 끌 수 있냐는 어이없는 질문만 되풀이할 뿐입니다. 심장마비가 왔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데도 그 말은 무시하고, 그저 업무의 매뉴얼대로만 일을 처리합니다. 아니 사실, 조금만 더 매뉴얼을 살펴봤다면, 다니엘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심장의 건강 문제로 인한 질병 수당 심사는 여기서 통과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연히 심사는 통과하지 못했고, 다니엘은 항고하기 위해 관공서를 찾습니다.
관공서의 직원들은 불친절하기 그지없습니다. 당장 심장이 아파 돈이 필요하다는 이에게 심사를 받으라 하고, 재심사를 받아 항고하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질병 수당 수급자 부적격이라는 통지서가 왔음에도 심사관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고 재심사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보는 이들마저 답답하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고작 몇 분 늦었다고 지원금을 축소한다는 케이티의 사례를 보며 이제는 이곳이 사람을 돕기 위해 지원금을 주는 곳인지 아니면 사람을 심사하기 위한 곳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항의하는 케이티와 그에 공감하여 화를 내는 다니엘에게 오히려 공격적이라며 내쫓는 상담사와 경비원의 모습은 공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그들이 다니엘과 케이티를 사람이 아니라 그저 업무 대상자로 보고 있다고 실감하게 합니다.
물론 이런 이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케이티에게 순서를 깔끔하게 양보하는 이름 모를 사람, 인터넷을 쓰지 못하는 다니엘을 아무런 불평 없이 도와주는 젊은이들, 다른 직원들과 달리 원칙만을 고지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내에서 복지 대상자를 도와주다 상사에게 혼나는 앤 등등은 여전히 세상이 마냥 차갑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에 대조되어 관공서의 직원들은 더욱 차갑고 매정해 보입니다. 사실 그들이 잘못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완성된 체계에 따라 효율적이고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중이죠. 그들 입장에서 다니엘과 케이티는 불청객으로만 보입니다. 만약 다니엘과 케이티가 수당을 받지 못해 너무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더라도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복지 시스템이 잘못한 거지. 난 하란 대로 했는걸.”
1961년 스탠리 밀그램은 한 실험을 합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는 ‘기억력 실험’이라고 하고, 학생 역할자가 문제를 틀릴 때마다 교사 역할자가 버튼을 눌러 전기충격을 주게 했습니다. 문제가 틀릴 때마다 전압은 15V씩 높아졌고, 전압은 450V까지 올렸습니다. 450V의 전압은 당연히 인간에게 치명적입니다. 학생 역할자는 실험팀의 일원이었고, 당연히 전압은 흐르지 않았지만, 학생 역할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서도 교사 역할자의 65%는 전압을 450V까지 올렸습니다. 실험 주최자가 책임진다는 말만 듣고 말이죠. 사람들이 얼마나 권위에 복종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권위를 갖춘 체계인 복지 시스템의 원칙에만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관공서의 많은 직원은 위 실험의 교사 역할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가 아니냐고요? 그들이 시스템에 따라 행한 일들 하나하나에는 사람들의 인생이 걸려 있었습니다. 케이티는 지원금을 받지 못해 성매매하러 가야 했고,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받지 못한 채로 생활하다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하여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케이티와 다니엘은 각각 인생의 나락과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공감은 하지 못한 채로 정부의 권위와 복지 체계에 기대어 책임을 회피한 겁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영화에서 복지 체계는 효율적입니다. 가장 많은 이들에게 정확한 도움을 주기 위해 이성적으로 모두가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에 따라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근데 복지 체계가 효율적이라는 위의 말은 모든 이에게 통용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인터넷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환경에 놓인 다니엘에게 인터넷으로 질병 수당이나 구직 수당을 신청하도록 권했고, 쓸모도 없는 이력서 특강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성심성의껏 쓴 이력서를 보고는 이력서 특강을 들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죠. 이 상황에서 아주 비효율적인 복지 체계는 사람에게 수치심까지 느끼게 합니다.
복지 체계의 사각지대에 놓여버린 상황. 절망적인 상황에 희망을 주는 것은 내가 세금을 낸 정부가 아니라 그저 옆에 살며 대화를 나누었던 이웃입니다. 정부와 체계, 관공서 직원이 해주지 못한 공감을 그들은 해줍니다. 다니엘은 케이티의 집을 고쳐주고, 케이티는 다니엘에게 식사를 나누어주며 서로의 힘듦에 공감합니다. 맨날 거친 말을 내뱉으면서도 친하게 지냈던 옆집 젊은이들은 다니엘에게 힘들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까지 남기죠. 그들의 삶은 가난하고, 더러울지언정 천박하지는 않습니다. 따뜻하고 아름답죠. 이런 연대는 답답하고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는 한 줄기 빛이 됩니다.
가난한 자들의 연대는 분명 삶의 희망이 되지만, 당장 생계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다니엘은 구직 수당의 길이 모두 막혀버리고 질병 수당의 항고 날짜조차 잡혀버린 막막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수치심은 느끼기 싫다며 구직 수당의 신청자 자격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다음의 문구를 씁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 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
이 말은 많은 행인들의 반응을 끌어냅니다. 사람들은 박수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미 많은 이가 복지 체계가 완전하지 않음을,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 고객으로 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또한, 사람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고, 노동 자원이나 숫자, 돈으로 대하는 세상 자체의 답답함을 대신 표현해준 다니엘 블레이크의 행위가 무척이나 통쾌했던 거겠죠.
물론 이 행동으로 다니엘의 항고 일자가 당겨지진 않았습니다. 경찰서에 갔다 온 게 이 행위의 유일한 결과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사회에 깊게 수치심을 느껴버린 다니엘은 집에 틀어박히고 건강이 악화합니다. 이에 자신이 늘 도움을 줬던 케이티의 딸 데이지가 다니엘이 걱정되어 다니엘의 집을 찾아와 이번엔 자신이 도움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 말에 다니엘은 간신히 항고할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항고 몇 시간 전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질병 수당을 받지 못하고, 건강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다니엘은 항고를 앞두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기 전 행적과 죽음은 우리에게 복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많은 사전에서 복지는 행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돈이 많고 당장 사는 데 문제가 없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대 사회에서 복지를 마냥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아마 국가에서 말하는 복지의 의미를 고민해보면 ‘사람답게 사는 삶’을 의미할 것입니다. 사람은 복잡한 동물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말마따나 유전자를 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동물이죠.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다른 생물들과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답게 사는 삶은 말 그대로 먹고 싸고 자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 고민 정도는 할 수 있으며, 자신이 한 개인으로 존중받는 삶을 의미할 것입니다.
영화에서 복지 체계와 관공서 직원들은 다니엘에게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 고민을 할 수 없게 하고, 개인으로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느끼게 합니다. 사람에 대한 공감이 없는 단순한 체계와 그 체계만을 따르는 생각 없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복지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돈을 타가는 고객으로 볼 뿐이죠. 그들의 삶, 생각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장 처한 환경에도 관심이 없는 공감이 결여된 차가운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언젠가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타인에 대해 공감하려 하지 않고, 그저 생각없이 원칙에 따라 자기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언젠가의 모습이 관공서 직원들과 겹쳐집니다. 이런 분위기가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복지 체계를 만들고, 그 체계에만 따라 움직이는 기계 같은 사람들이 가득하게 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사람에게 좀 더 공감하며 연대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다니엘 블레이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