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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ja May 31. 2024

일상을 헤매며

<언어의 정원>


 일상을 산다는 것. 그러니까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정말 익숙지 않다. 아니, 귀찮고, 고통스럽고, 짜증 난다. 원래는 알지 못했던 일상을 살아간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난다. 그렇게 난 모두가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회사의 연봉은 박봉. 하는 일은 많다. 비전이 있는 회사인가? 글쎄. 아닌 것 같다. 아마 언젠간 난 이 회사를 나가겠지. 그래도 처음으로 나를 선택해 준 회사니까.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서 어두운 심해를 기어다니던 나를 끌어올려 준 곳이니까. 라고 생각하며 누구나 그렇듯 너무나 힘든 일상을 당연하듯 하고 있다.


 다른 세상에 와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이면 어떤 글을 쓸까? 어떤 공부를 해볼까? 어떤 인문학 책이 재밌을까?를 고민하던 고고한 백수는 이제 없다. 어떤 상품을 만들지 기획하고, 그 상품을 팔 문구를 고민하는 지쳐가는 회사원이 남아있다. 어떻게든 들어오고 싶었던 세계. 내가 가기엔 멀다고 느꼈던 세계에서 난 여전히 버거움을 느낀다. 사람들이 가득한 전철 안에서 이토록 원했던 톱니바퀴의 일상을 얻은 나는 이젠 벗어나고 싶다. 사람이란 참 영악하다.


 좀 있으면 장마가 온다. 비가 오면 수업을 빼먹었던 주인공이 부러워진다. 학생이니 학교에 빠진 것은 책임을 져야겠지만, 어른이 된 나는 비가 온다고 회사를 안 갔다가는 책임을 질 것이 너무 많아진다. 나도 빗소리 들으며 가만히 앉아있는 거 참 좋아하는데. 생각해 보니 회사에 입사한 지 어언 3주가 넘어가는데 회사 가는 날은 비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왠지 조금 슬퍼진다. 비가 온다면 적어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한 번쯤은 회사를 안 가 볼 텐데. 하늘이 좀 너무하다 싶다.


 하늘은 쨍쨍한데 마음엔 비가 온다. 제휴사에서 기획을 몇 번을 퇴짜맞았는지 모르겠다. 옥장판의 유래는 설명할 수 있어도 옥장판을 파는 건 못할 거라던 친구의 말이 내 맘을 후벼 판다. 어렵고, 어렵고 어렵다. 역사를 정말 사랑했고, 사랑하는 나는 역사를 수단으로 상품을 기획한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역사가 남에게 퇴짜를 맞고, 나에게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것을 나는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지금 있는 세계를 나가고자 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목적과 수단이 정확히 일치한다. 구두를 만드는 것. 나도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매정했다. 나에게 역사를 수단으로 써야 한다고 계속 말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봤다. 모두가 물었다. 그걸 왜 보냐고. 웃어넘겼다.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렸을 때야 목표의 하나로 이 시험을 봤지만, 이제는 완전히 수단이 되어버린 이 시험을 그저 열심히 봤다. 당연하게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 깊이, 무척 슬퍼졌다.


 곧 있으면 장마가 온다. 비를 좋아하는 나는 그저 빗소리를 즐기고 싶을 뿐이지만, 비가 오는 날에 야외 상품을 팔 수 없는 것이 먼저 생각나겠지. 더욱 희미해지는 언젠가의 목표에는 이제 아련함조차 남지 않아 텅 비어있다는 것만 느껴진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


 여전히 나는 걷고 있다. 일상을 걷고 있다. 하지만, 이 걸음이 어디로 나아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아갈 수 있었던 주인공과 달리 나는 그저 헤매고만 있다. 평생을 이럴지도 모른다. 이번 여름 기나긴 장마가 올 때 나는 그립지만 비어버린 목표를 찾을 수 있을까?


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는 일 없어도

나는 머무를 겁니다. 

당신이 붙잡아 준다면


 내가 붙잡아야 할 목표가 나를 붙잡아주길 바라고 있다니 역설적이다. 하하. 그래도 내가 그렇게 좋아한 역사가 한 번쯤 나를 잡아주진 않을까 기대해 본다. 헤매며 사는 나가 아니라 나아가는 나로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헛되지만 간절히 소망을 전해본다. 


 여름이 온다. 톱니바퀴 안에서 헤매는 첫 여름. 장마가 지나고 다시 해가 떴을 때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헤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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