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보물 정기조사
3월 2일까지 <RE:BORN, 시간을 잇는 보존과학>이라는 주제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보존과학, 말로는 대충 이해가 될 겁니다. 유물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과학이겠죠. 열린 수장고를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많이 보여주면서 더욱 친숙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흰 가운을 입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던 이들이 무척 신기했던 기억이 여전합니다. 인문학이 가득한 박물관에서 과학으로 그 인문학을 보존하는 일. 생경하지만, 멋있고, 뭔지 모르게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위 전시에서 보존과학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물 속 시간과 기억을 읽고 되살리는 작업이라면서요. 보존과학자를 과거의 흔적을 분석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그려내는 ‘시간과 대화하는 사람(Time Scientist)'이라고 표현합니다. 보존과학자가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시간을 연장하는 보존처리, 시간을 밝히는 분석연구, 시간을 되살리는 복원복제. 이처럼 보존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함과 말들 속에 낭만을 숨기고 있지만, 실제는 무척 힘든 작업입니다. 유물의 재질부터 손상을 모두 고려해야 하고, 시간의 흐름과 손상을 구분하여 정리해야 합니다. 무수한 작은 판단들을 매번 내려야하죠. 여기 몇 백 년을 살아 온 책들이 있습니다. 몇 백 년을 국가적 차원에서 소중히 관리 받아 왔지만, 자연의 법칙은 피하지 못했기에 잘못 손대면 바로 찢어지고 바스러질 것만 같은 책들. 그 책들의 시간을 밝히는 조사를 여전히 5년에 한 번씩 하고 있습니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만들어질 때부터 재료가 많지 않아 퇴고된 최종본을 그대로 책으로 엮었고, 종이가 다른 실록에 비해 매우 얇은 편입니다. 거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서 대출, 반납되었던 과거까지 있어 상태가 더욱 좋지 못합니다. 한 장 한 장 넘겨볼 때마다 아주 세심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실록을 넘길 일은 없었습니다. 옆에서 보고 보조를 할 뿐이었습니다.
정기조사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유물을 조사할 수 있도록 수장고를 세팅합니다. 오랜 시간 유물을 조사해야하기에 실온이 아닌 항온항습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유물이 가장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수장고에서 유물을 조사해야 합니다.(경우에 따라 관람객이 없는 경우 항온항습이 잘 되어 있는 전시실에서 유물을 조사하기도 합니다.) 둘째, 유물을 조사할 곳으로 옮겨옵니다. 포장재를 넣은 박스에 유물을 넣어 조심히 운반합니다. 책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도자기 같은 것을 조사할 때는 정말 살 떨린다고 하더군요. 셋째, 유물을 조사합니다. 이전에 조사했던 자료와 지금 조사했던 것을 비교하여 정리합니다. 내용을 수정하기도 하고, 추가하기도 합니다. 넷째, 유물을 전시실이나 수장고의 수납장으로 되돌립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한 내용을 문서화합니다.
이런 유물조사는 국가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소장자가 국립기관이라면 그 기관의 학예사가 조사를 하고, 개인 소장이라면 국립기관에서 파견하여 조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 맡은 것은 국가유산청이 가지고 있는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대부분의 의궤였습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다 합쳐서 100~200권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포함하여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것들을 조사하기 위해 평창과 서울을 참 많이도 오갔습니다. 인턴 생활하면서 이렇게 많은 출장을 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즐겁고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첫 정기조사는 평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상설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실록과 의궤를 전부 조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실록과 의궤의 조사방법은 정말 단순합니다. 한 장 한 장 넘겨보기. 전 글에서 포쇄할 때 한 장 한 장 넘겨 책을 말린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합니다. 문제는 한 장 한 장 그냥 넘기는 것이 아니라, 유실, 충식, 오염, 변색된 부분이나 이물질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넘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 하나마다 셋에서 네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붙어서 일을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쪽수입니다. 전에 기록된 쪽수와 정확히 같아야 하기 때문에 조사할 때 센 쪽수가 기록된 쪽수와 다르면 안 됩니다. 특히 쪽수가 기록되어 있는 실록과 달리 의궤는 쪽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몇 권은 보고서에 있는 쪽수와 이번에 센 쪽수가 맞지 않아 5번씩 세기도 했습니다.
쪽수 세는 것 자체야 유물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만, 시간에 따른 문제인지 아니면 손상에 따른 문제인지는 사실 보통의 학예사 분들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존과학을 전공하시는 학예사 분들이 와야 합니다. 사람 적은 실록박물관에 보존과학 학예사가 있을 리 없으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파견을 오셨습니다. 1박 2일 동안 평창에 머무르시면서 상설전시실에 있는 모든 실록과 의궤를 조사했습니다. 마지막 이틀째는 어떻게든 끝내기 위해 야근까지 했습니다. 국보와 보물이라 가뜩이나 긴장해서 힘들어 죽겠는데 야근까지. 끝나고 바로 학예사 분들이랑 회식했습니다. 아, 역시 힘든 날엔 술이지.
평창에서 있었던 2주 후 서울로 출장을 갔습니다. 처음 들어가 보는 국립고궁박물관 사무동. 그냥 하나하나가 다 신기했습니다. 가장 신기했던 건 로봇청소기였습니다. 센서도 확실하고, 프로그래밍도 잘 되어 있는지 바닥을 곧잘 닦더군요. 저런 거 집에 두면 좋겠다해서 물어봤더니 1년에 약 1000만원으로 돈으로 임대한다는 말을 듣고, 포기했습니다. 잠시 로비에 앉아 있다가 사무동으로 들어갔고, 보존과학과 학예사 분들과 합류하여 수장고로 들어갔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는 관리하시는 분들이 따로 있을 정도로 넓고 설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유물을 따로 촬영하는 장소나 유물을 운반하기 위한 설비들이 잘 되어 있습니다. 물론 보안도 확실하고요. 실록박물관 수장고보다 훨씬 넓어서 조사하기도 편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수장고에 잠들어 있는 유물들의 목록을 보며 이런 게 다 있다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국보 보물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대략 두 시간을 조사하고, 삼십 분 정도 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다가 국보·보물을 손상시키면 그것이야말로 본말전도니까요. 두 시간 내내 집중력을 다 쏟으면서 서 있다가 쉬면 그것만큼 꿀맛이 없었습니다. 사실 진짜 꿀맛은 점심시간에 있었습니다. 고궁박물관 바로 옆은 서촌입니다. 평창에는 없는 음식점이 즐비하죠. 정기조사를 위해 서울로 출장 왔던 것은 총 세 번. 기억나는 것은 네 번의 점심입니다.
‘효자왕족발’이란 곳이 첫 점심이었는데 순두부에 보쌈까지 점심 정식으로 인당 만원이 안 넘는 혜자 맛집이었습니다. 근처 직장인들 성지 수준이라 점심에 일찍 갔는데도 살짝 기다려서 들어갔습니다. 싼데 양 많고 가격까지 괜찮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박혀있는 집입니다. 다음날 점심은 대선칼국수였습니다. 적당히 양 많고 맛도 무난했습니다. 학예사님이 만두도 시켜주셨는데 만두는 그냥 먹을 만했습니다. 솔직히 유천막국수 꿩만두가 더 맛있었던 듯합니다. 7월 정기조사 때는 솥솥이라는 솥밥집을 갔습니다. 이미 맛집으로 유명한 데라 오픈에 맞추어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격은 제법 비쌌지만, 맛이 괜찮아서 좋았습니다. 평창을 떠나기 직전이셨던 선임 학예사 분이 사주셔서 제가 돈을 안 내긴 했지만요. 8월 정기조사 점심은 거북이의 꿈이라는 마제소바집이었습니다. 무난하게 먹을 만했습니다. 마지막에 밥까지 비벼먹으니 딱 양이 제게 알맞았습니다.
책 수가 워낙 많은지라 두 번의 평창조사와 세 번의 서울조사로도 정기조사를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이전에 인턴을 마무리하고 나왔기에 마지막 서울조사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서있을 때야 힘들었지만, 국보와 보물을 진열장 바깥에서 마주한다는 즐거움과 고궁박물관 수장고를 들어갈 수 있다는 설렘 등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다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경험과 감정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보존과학자 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시와 행정, 복원 등의 업무를 하면서도 곳곳에 있는 국가유산에 대한 추가업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한 유물 정기조사나 경복궁 낙서 사건이 대표적인 예죠. 국가유산이 가진 시간을 연장하고 밝히며 분석하는 보존과학자가 있음을 꼭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시간을 더 오래 지키는 일, 그 멋짐과 낭만이 그분들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