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일상-게임

by baekja

배가 통제된 탓에 제 날짜에 휴가를 나가지 못했고, 나가지 못한 채 당장 월요일에 훈련을 받게 된 나는 좌절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같이 휴가를 나가려던 동기와 근 기수의 선임들과 월요일 하루 휴가를 취소하지 않고 백령도 내에서 놀기로 했다. 차도 없고 교통편도 마땅찮은 백령도 내에서 할 것은 별 거 없었다. 해병대 매점에서 이것저것 사고 점심은 TV에도 나온 백령도의 북한식 냉면을 먹은 후에 바로 들어간 곳은 PC방이었다.


사실 나는 PC방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당장 가서 할 게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 하겠다. PC방을 가는 이유는 아마 친구들과 재밌는 게임을 함께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게임에 흥미를 상당히 잃은 나는 PC방을 가는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전히 게임을 보는 것은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내가 그 게임을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 쪽에 가깝다 하겠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 일주일에 한 시간으로 게임 시간을 강제 당했기에 실력이 느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었으며 나중에는 컴퓨터 사양 자체가 낮아져 스타크래프트를 제외한 게임은 돌리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게임을 안 하다 보니 당연히 게임을 못하는 것은 당연했고 못하다 보니 안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것 말고도 안 좋아하게 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쯤 컴퓨터 사양이 좋아지고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사이퍼즈란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나름 재밌어서 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탱커와 딜러의 개념조차 없던 내가 게임을 잘할 리는 없었다. 자연히 친구들과 게임을 안하고 혼자 다른 사람들과 할 때는 온갖 나쁜 말들을 들어야 했고, 즐기면서 하는 게임에 이런 말들을 들어가며 굳이 해야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아 가볍게 접어버렸다.


그렇게 게임에 대한 흥미는 아예 사라졌었다. 하지만 군대에 들어와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가까운 기수에서 보는, 나는 처음 보는 롤(League of Legends)방송에 매혹됐다. 정말 재밌었다. 아무것도 몰라도 볼만 했기에 계속 봤고 보다 보니 관심도 늘었다. 그렇게 롤 방송을 꼬박꼬박 챙겨본지 어언 9개월, 나는 바야흐로 백령도의 한 PC방에서 인생 첫 롤을 하게 되었다.


감상을 말하자면, 아주 재밌었다.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렇게 못하는 데도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못해도 욕하지 않고 웃으며 넘어가는 친한 사람들과 하는 게임은 늘 재밌지만 왜 롤이란 게임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끄는지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롤이란 게임이 얼마나 귀찮고 어려운 게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이템을 뭘 맞추는지를 알아야 했고 어떤 챔피언이 좋은지를 알아야 했으며 다른 사람이 공격을 오지 않을까 고민해야했으며 스킬을 어떻게 배분해야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이쯤 되자 정말로 내가 항상 방송으로 보는 프로게이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정점에 오래토록 내려올 줄을 모르는 'Faker'라는 게이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쯤 생각이 미치자 미술작품하고 작가 이름 외우는 게 백만 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어려움에 짜증이 날 때쯤이면 그냥 책에 있는 글자만 읽고 외우는 게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이건 공부건 뭐가 그것이 직업이 되는 순간 대부분 재미가 없어지는 이유는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 대한 재미를 잃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직업을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분야에 대한 재능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지. 그래서 우리는 학자건 프로게이머건 그 분야에 대해 최고점을 찍은 사람들을 인정해주고 엄지를 치켜세워주는 것일 게다.


사실 지금 내가 공부하는 미술이나 게임이나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아마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게임 회사의 패치에 따라 게임의 메타(게임을 플레이하는 스타일)가 변하듯 사회상이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비평가, 사상가 혹은 예술가들에 의해 미술계를 이끄는 주요 사조가 변화한다. 프로게이머들이 전의 프로게이머들의 플레이 방법을 보고 자신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것과 같이 전의 예술가들의 작품과 생각을 통해 현재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작품과 생각을 완성해 가기도 한다. 그리고 프로게이머들이 챔피언의 특성과 스킬을 외워 깊은 이해를 해야 하는 것처럼 예술 평론가나 예술가들은 동시대 혹은 전대의 미술작품의 스타일이나 그리는 방법 등을 외워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극단적인 비교이긴 했지만 이런 비교들을 해보니 정말 게임을 오래 해서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싶지 않았다. 정말 가끔 친구들과 하는 일탈 그 이상이 되지는 않겠다 싶었다. 그때 만큼은 정말 재밌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뒤에 남는 것은 허무함 말고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 위의 비교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게임에 투자할 시간이 얼마나 없는 지를 다시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 때쯤이면 난 미술품을 보며 만족하고 즐거워했던 나 자신을 떠올리며 다시 미술관을 갈 것이다. 내 취미가 게임이 될 수 없는 장황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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