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일상-역마살

by baekja

며칠 전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오늘의 운세’라는 TV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남녀 소개팅을 시켜놓고 사주와 점성술, 관상, 심리학의 전문가들이 와서 그 남녀의 소개팅 성공여부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이라며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친구가 했던 한 마디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너 역마살이 있어서 백령도로 간 거 아니야? 집 가까운 수원 놔두고 백령도를 갈 이유가 없잖아?” 늘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이야기. 내 사주엔 역마살이 있다는 것이었다.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서도 조금은 궁금해져 다시 무료 사주 사이트에 접속해서 사주를 봤다. 어떻게 사주를 보든 가만히 있는 것보단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신기했다. 지금이야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것을 즐기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어렸을 적에 나는 학년이 올라가며 반이 바뀌는 것을 즐기지도 않았고 학원 반이 바뀌는 것도 썩 즐기지 않았다.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썩 쉽지 않았고 새로운 건 늘 미지의 세계인지라 두려움이 늘 동반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가는 새로운 곳은 늘 신기했고 재밌었다. 새로운 자연의 풍경, 처음 보는 미술품들, 새로운 문화 유적들 항상 내 마음을 빼앗았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새로운 곳을 다니는 것을 참 좋아하는구나.’라고 느낀 건 고등학교 때였다.


답답하다는 점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전원 기숙사의 산골 고등학교는 집에 가는 횟수마저도 두 달에 한 번 정도로 그 조그만 산골 속에 학생들을 공부만 시키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부모님의 공부 압박에서 벗어난 나는 즐거웠고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1학년 때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매우 넓은 세상,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경험한 후에 본 매일 보는 공주 산골 한 구석의 모습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간신히 1학년을 넘기고 2학년이 되었을 때, 난 방법을 하나 찾아냈다.


어차피 목표로 하는 과는 사학과 아니면 미술사학과였으므로 수시 스펙을 쌓는다는 명목으로 이곳저곳으로 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시작은 공주 근처의 백제 문화 유적을 답사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종국에는 경주에 혼자 가서 노숙을 하고 문화 유적을 보기도 했다. 매우 즐거웠고, 행복했다. 일탈에서 나오는 쾌감을 넘어선 새로운 경험을 쌓는 데서 나오는 행복. 그건 내가 답사를 그치지 않도록 이끌었다.


이는 학교에서 물리적인 거리를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입시 공부에 대한 정신적인 거리를 떠나는 것에까지 이어져 내신은 뒷전으로 쌓아두고 독서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한국사, 세계사, 미술사 공부한 시간이 국어, 영어, 수학 공부한 시간보다 많았을 정도이니까.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입시를 끝내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에 와서는 술에 취해 살았는데 이마저도 한 군데 가만히 있지를 못해서 서강대 앞, 신촌, 왕십리, 건대 앞, 송도 등지의 술집에 친구들만 있다면 찾아가서 술을 먹는 일을 계속했다. 어느 날은 왕십리에서 술 먹는 약속이 취소됐는데 택시 타기 싫다고 새벽 1시에 왕십리에서 신촌까지 걸어오는 일도 했었다. 나름 재밌었다. 이런 일이 취미가 들자 그저 새로운 곳을 마냥 돌아다니는 일도 자주 있었고 도봉구 쪽에 있는 경기 학사에 들어갔을 때는 서울에서도 완전히 처음 보는 그 주변의 풍경을 보러 걷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없는 대학 생활을 보내고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는 완전히 새로운 곳이었다. 힘들어서 정신없기도 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신기해하며 적응하느라 잠시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며 떠도는 내 삶은 잠시 집어넣어두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자대를 선택할 때가 되었을 때쯤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성적에 맞추어 수원을 갈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러 백령도를 갈 것인가. 아마 인생에서 다시 갈 일 없을 것 같은 백령도를 배 값을 지원받고 무료로 갈 수 있는 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잠시의 고민은 넣어두고 역마살을 따라 백령도에 지원했다. 섬과 바다라는 완전히 새로운 풍경은 내 눈을 사로잡았고 사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백령도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미 1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나는 다른 곳으로 또 떠나고 싶은 마음만이 남았다. 군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답답함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겠지.


역마살은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액운이라고 한다. 백령도에 와서 보직의 최고 높은 병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이런 액운이 아닐까 싶다. 아마 다른 부대였으면 이쯤 되면 일을 매우 적게 한다고 하는데 그런 건 좀 부러웠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것이 늘 액운일 수는 없다. 집에 눌러앉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여행지, 유적지를 찾아다닌 덕에 나는 미술사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학문의 세계를 계속 떠도는 일이 제일 하고 싶은 것이라는 내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한 곳에 진득이 눌러 붙어 있지 못하는 게 좋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지나온 인생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때에 하고 싶은 경험, 다시는 해 볼 수 없는 경험들을 많이 해보았으니 내 액운일지도 모르는 역마살에 대해 오히려 만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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