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일상-여행

by baekja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늘 설렌다. 새로움은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지금도 전역 후에 어느 곳을 가볼지 고민하고 또 생각하며 방구석에서 설레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여행을 좋아하고 또 여행계획을 짜며 설렘을 느끼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다들 제각각일 터. 나조차도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렸을 때와 지금이 다르니까 당연한 것일 게다.


1살 때 유럽을 여행했던 기억은 전혀 없으니 제쳐두고 조금씩 기억이 남아있는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하자. 초등학생 때 갔던 긴 여행 중 기억에 남는 것은 각종 국립박물관을 돌아다닌 것이다. 국립중앙, 국립청주, 국립공주, 국립부여 등등 다양한 지역에 위치한 국립박물관과 그 주변에 위치한 유적지들을 돌아다닌 것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여행마저도 무언가를 배우는 게 좋다며 박물관을 다니며 늘 역사를 가르쳐주셨다. 한창 뛰어다니며 돌아다닐 초등학생이 박물관에서 가만히 서서 역사를 배우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곳들을 따라다닌 것은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던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놀아주신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그냥 네 가족이 함께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당시의 내가 여행을 좋아했던 이유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역사를 잘 알게 하는데 성공하셨다. 아들은 완전히 역사에 푹 빠져버렸고 박물관의 유물들에 정신을 온통 뺏겨버렸다. 그리고 그 아들은 그 관심에 따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서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같은 책들을 빼보기 시작했다. 문화유산을 배우고 찾아가는 여정 속에 당연히 한국의 방방곡곡을 알게 됨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은 자립심을 길러야 한다는 이유로 나에게 여행 계획을 맡기셨고 내가 선택한 곳은 곳곳의 문화유산이었다. 구례 연곡사, 순천 선암사와 송광사, 서산 개심사, 합천 해인사, 안동 봉정사, 영주 부석사 등의 유수의 사찰과 안동 병산서원과 하회마을, 순천 낙안읍성, 서산 마애삼존불과 해미읍성, 영주 소수서원 등의 유적지는 모두 내가 계획을 짜서 다녀오게 된 한국 곳곳의 여행지였다. 이런 여행지들을 선택하고 가려낼 정도로 머리가 커버린 사춘기의 나는 이미 부모님과 갈등을 보이든 보이지 않든 겪고 있었고 초등학생 때 가족이 다 같이 다녀서 좋다는 의미의 여행은 잊은 지 오래였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나는 여행지의 구석구석에서 겪는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게 되었다. 전혀 새로운 풍경, 새로운 소리, 새로운 촉감 등. 내가 전에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은 이미 주변에 질린 사춘기의 나를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고등학교 때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문화유적을 찾아다녔고 새로운 문화유적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을 좋아했다. 거기에 덧붙여 이제는 여행지에서 지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보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시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가서 지식을 얻고 문화유산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 그것이 내 여행의 목표가 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 여행지의 분위기를 느낄 새는 없었다. 그저 더 많이 새로운 지식을 얻어내야 했으니까. 여행지의 특산품이 무엇인지, 여행지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찾아 먹을 겨를도 없었다. 문화유산의 단청 하나, 서까래 하나, 기와 하나, 주춧돌에 새겨진 문양하나까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관찰해서 내 머릿속에 집어넣어야했으니까. 그렇게 지식을 쌓는 여행은 내 평생 바뀌지 않을 여행 목적이 될 거라 내 무의식 속에서는 확신했다.


여행의 정의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감.’이라고 백과사전에 적혀져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갔던 여행은 유람보다는 일을 위해서 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내 꿈을 위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 그곳을 방문했던 것이니까. 그리고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여행을 갈 생각조차 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자 달라졌다. 국어, 영어, 수학 공부가 아닌 미술이나 역사 공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던 철없던 10대는 이제 더 많은 사람과 더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더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게 되었다. 매일 매일 새롭게 변화하는 일상은 잠시 여행을 잊게 해주었다. 굳이 새로운 것을 멀리 가서 찾지 않아도 내 가까운 곳의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했으니까. 이렇게 변화하는 일상을 즐기며 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쯤 2학년 1학기가 끝나고 갑자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처음 택한 곳은 부산이었다. 우리나라 제 2의 대도시이지만 가 본 기억조차 희미한 부산은 나에게 있어서는 미지의 신세계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처음 내 자신의 힘으로 목적지를 선택하고 처음으로 혼자 가보고 자고 오기까지 한 여행이 막 시작되었다. 여기서도 역사문화유적지는 아니었지만 부산 곳곳의 유명 명소들을 하루 안에 다수 볼 수 있도록 계획을 짰다. 무척이나 즐거웠다. 혼자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책임이 따르긴 해도 무척이나 자유롭다는 것이니까. 그렇게 이곳저곳을 다니고 도착한 곳은 광안리 앞바다였다. 아름다운 광안대교의 야경이 눈앞에 보이는 그곳에 나는 맥주 한 캔을 들고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그 날 여행의 첫 휴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날 만보기에 찍힌 5만보의 걸음은 내가 얼마나 고된 여행을 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여행에서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잔잔한 바닷가의 분위기가 나를 평화롭게 만들어 주었다.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난 나는 잠시나마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음에 이 여행을 잘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처음 겪는 나 홀로 여행에 외로움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평화롭지만 내가 여기에 있음을 아무도 모르는 외로움.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 서러움이 나를 몹시 힘들게 했다. 밤바다의 평화로움과 홀로 타지에 있다는 외로움의 내적 갈등 속에 뒤숭숭한 마음으로 광안리 해수욕장을 떠나 찜질방에서 잠을 잤다. 외로움 같은 고민은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몇 주 뒤 이번에는 친한 친구들과 여수로 향했다. 여수에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역시 기억나는 것은 친구들과 함께 바라본 여수의 밤바다였다. 화려한 불빛이 가득한 여수는 이곳이 매우 유명한 관광지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똑같은 밤바다였고 똑같은 맥주 한 캔이 손에 들려있었지만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 그저 환한 빛들이 수놓아진 검은 여수의 밤바다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며 친구들과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부산에서의 내 모습과는 달라 이질감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누군가와 같이 가는 여행이 생각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새로운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여행에서 의미를 찾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가족과 함께 무언가 하기를 바랐던 꼬맹이는 이제는 가족이 아니어도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이 즐거운 사람으로 변했다.


그 후의 여행은 누군가와 함께 가는 여행이 대부분이었다. 사실상 답사에 가까웠던 4박5일의 빡빡한 일본여행도, 전역 후에 예정된 제주도여행도 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혼자 쌓는 경험보다는 함께 쌓는 경험이 더 풍부할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혼자 가는 여행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혼자 부산을 갔을 때 느꼈던 자유로움과 밤바다에서 본 평화로움은 혼자일 때의 외로움을 고려하고도 충분히 느낄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의 역할이 특정되어있고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이 가득한 군대에서 나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나의 페르소나를 벗지 못하는 이 상황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이런 답답한 군대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자유와 평화를 느끼기를 바라고 있다.


가족들이 좋아 떠났던 여행은 새로운 지식을 얻는 여행으로 바뀌었으며 누군가와 함께해서 얻는 새로운 경험과 감정이 좋아 떠나는 여행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나는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여행(사실상의 답사)을 떠나기도 하고 친구들과 추억을 남기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정말 간절히 여행을 바라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일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떠나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 그것이다. 2년 동안 이미 내 페르소나를 파악하고 나에 대한 고정관념이 가득한 사람들로 인해 시달릴 만큼 시달렸으며 새로웠던 일상은 이제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지루함으로 가득 차버렸다. 그로부터 벗어나 잠시 차 한 잔과 시 한 수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그런 휴식 같은 여행이 지금 나에게 강렬히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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