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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식 Aug 14. 2024

잊을 수 없는 사람

<어파이어>


 <어파이어>에서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과 함께 휴가를 온 펠릭스(랭스턴 위벨)는 예술학교 진학을 위한 포트폴리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해안가에서 만난 구조요원 데비드(에노 트렙스)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데비드가 매일 아침 해안가를 걸으며 사람들이 행복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을 본 다음 구조요원 전망대에 앉아 그들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는 말에 착안하여 바다를 찍으려고 했던 원래의 계획을 바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초상을 담은 기획물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펠릭스는 레온에게 테스트 사진을 찍었다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인물의 후면을 촬영한 사진을 보여준 다음 그 인물의 정면을 촬영한 사진을 이어서 보여준다. 이러한 포트폴리오 작업은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를 만나 한 단계 더 발전하는데 헬무트는 인물들의 정면, 후면 사진 중에서 정면 사진이 먼저 나열되어야 하고 더불어 사진 한 장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펠릭스는 자연스럽게 바다라고 대답한다. 펠릭스는 처음 바다라는 ‘풍경’을 찍으려고 했다가 생각을 고쳐 풍경 대신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을 찍기로 한 다음, 헬무트의 조언을 듣고 다시 생각을 바꿔 ‘풍경’ 또한 찍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펠릭스의 계획 변경은 마치 인간이 풍경을 인식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과 유사하다.


 '풍경'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한눈에 보이는 자연이나 넓은 지역의 모습을 뜻하거나 어떤 일이 벌어지는 장면이나 모습을 뜻한다. 풍경을 바라보는 이에게 있어 그 풍경은 보통 때와는 다를 것이기에 풍경은 자연스럽게 이질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풍경은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특별한 경관이나 정경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만약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가 풍경이 익숙해진다면 풍경은 일상적인 경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풍경은 고정된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주체의 경험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며, 그 경험은 일상의 낯익음과 대비되는 어떤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즉, 펠릭스는 처음 바다라는 풍경을 보러 갔다가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자신이 보는 바다와 그들 각자 바라보는 바다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헬무트는 사진이 더 필요하다고 할 뿐 무엇을 찍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펠릭스가 바다라고 대답할 때 눈짓으로 긍정할 뿐이다. 펠릭스가 무엇을 찍든 그것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온은 어떠한가? 레온은 펠릭스의 계획을 듣고는 바다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정면을 촬영할 경우 그들이 바다를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고 그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볼 거라며 퉁명스럽게 얘기한다. 하지만 이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물론 레온 본인은 알지 못한다). 레온은 휴가 동안 자신의 소설을 퇴고하기 위해 바닷가에서 수영 한번 하지 않고 소설 원고를 쳐다보지만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펠릭스가 수영하러 간 사이 별장에 남은 그는 퇴고는커녕 혼자 공놀이를 하다가 먼저 별장에 머물고 있던 나디아(파울라 베어)의 방으로 가 노트를 훔쳐보고 음악을 듣는다. 펠릭스, 나디아, 데비드와 함께 식사를 할 때에도 그들의 대화에 어울리지 못한 채 데비드에게 무례한 질문을 하다가 분위기를 망친다. 레온은 나디아에게 호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고를 핑계 삼아 바다를 보러 가자는 그녀의 제안을 여러 번 거절한다. 또한 친구인 펠릭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과 자신의 소설 출판을 담당하고 있는 헬무트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닫는다. 레온은 남들과 같은 장소에 머물고 있음에도 주변 상황을 바라봐야 할 때 소설을 핑계 삼아 관찰하지 않으며, 막상 소설을 쳐다봐야 할 때는 딴짓을 한다. 레온은 풍경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과 일상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은 오히려 이렇게 무관심한 사람이 풍경을 발견한다고 한다. 구니키다 돗포의 단편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서 무명작가 오쓰는 여관에서 우연히 만난 화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10여 년 전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가던 중 햇볕에 빛나는 갯벌에서 무언가를 줍고 있는 한 남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는데 배가 점차 멀어지자 그 사람은 검은 점처럼 보였고 해변과 산, 섬 전체가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오쓰는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의 모습을 지금까지 자주 떠올렸다며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마치 어떠한 풍경처럼 묘사하는데 그가 말하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자신과 가까워 잊어서는 안 되는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삶의 어떤 장면에서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뜻한다. 가라타니는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오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타인에 대해 ‘나와 다른 사람의 구별이 없다’고 말하는 식의 일체감을 느끼는데 거꾸로 보자면 눈앞에 있는 타자에 대해서는 냉담한 것이고, 이렇게 주위의 외적인 것에 무관심한 ‘내적 인간’에 의해 처음으로 풍경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풍경은 고독하고 내면적인 상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바깥’을 보지 않는 자에 의해 발견된다는 것이다. ‘내적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대상이 된다. 그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않는 사람이다. 펠릭스와 데비드는 고장 난 펠릭스의 차를 견인하기 위해 함께 숲으로 떠났다가 대형 화재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이후 레온과 나디아가 시체안치소에 방문하는 장면이 헬무트의 보이스오버와 함께 전개된다. 레온은 서로를 껴안고 불타 죽은 둘을 보며 고대 폼페이에서 화산 폭발로 인해 죽은 연인의 화석을 떠올린다. 그는 울고 있는 나디아를 보며 같이 울고 싶었지만 폼페이에 관한 이미지와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레온은 친구의 죽음에서 풍경을 발견한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란 친구 펠릭스가 아니라 누군지도 모르는 이천 년 전 폼페이의 연인이다. 레온도 오쓰처럼 ‘내적 인간’이다. 


 다야마 가타이의 소설 「이불」에서 소설가 도키오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제자 요시코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요시코에게 애인이 생기자 도키오는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갈라놓기 위해 노력한다. 요시코에 대한 추악한 상상도 해보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결국 요시코가 떠나고 도키오는 그녀의 이불을 덮으며 성적 욕망을 드러낸다. 「이불」은 다야마 가타이가 도키오를 통하여 자신의 경험을 드러낸 자기 고백적 '사소설(私小說)'의 시초로 여겨진다. 가라타니는 추악한 질투심과 지식인의 위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인 이 소설이 일본문학에서 나타났던 성과는 완전히 다른 성, 억압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 성을 그렸기 때문에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또한 이러한 ‘고백’이라는 형식 또는 제도가 내면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에는 ‘간음하지 말라’는 교리가 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만 해도 죄를 짓는 것이라 가르친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경우 회개라는 제도를 통해 고백해야 한다. 고백은 일상적으로는 얘기할 수 없는 자신의 추함이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가 작동하면 자신은 내면을 봐야 한다. 만약 고백이라는 제도가 없다면 굳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찾지 않는다.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어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의무가 감춰야 할 무언가를, 내면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헬무트는 요양원에서 레온이 쓴 책을 읽고 있다. 헬무트의 보이스오버는 레온이 펠릭스에게 헌정하기 위해 쓴 소설을 읽은 것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카메라 전환은 보이스오버 이전의 영화 내용이 소설에 포함되었으리라고 짐작하게 한다. 펠릭스의 작업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싫은 소리를 하는 장면, 데비드에게 무례한 질문을 하며 공격하는 장면, 호텔 직원이 작가 이름을 잘못 말했다며 비웃다가 그 직원에게 들키는 장면, 나디아가 퇴고하던 소설을 비판하자 그녀를 욕하는 장면, 병원에서 나디아와 헬무트가 대화하는 걸 보고 오해하여 그녀에게 화내는 장면 등 레온의 추한 행위들이 헬무트가 읽은 소설에 포함되어 있을 것 같은 강한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레온은 '사소설'을 썼다. 그리고 친구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 상황에서 폼페이의 풍경을 떠올린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헬무트는 펠릭스의 포트폴리오 중에서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과 바다가 찍혀있는 사진을 소설의 마지막에 넣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여자의 앞모습이 찍힌 사진은 없다. 레온이 이 여자가 나디아냐고 묻자 헬무트는 펠릭스에게 행동한 것처럼 눈짓으로 무언의 긍정을 보낸다. 그리고 나디아가 등장한다. 잠시 레온이 나디아를 처음 바라보는 장면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는 나디아가 빨래를 널고 자전거를 타고 해변가로 나아가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본다. 그는 오쓰처럼 나디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런데 레온은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했다고 나디아에게 말한다. 멀리서 스쳐 지나가듯 바라본 나디아라는 풍경은 레온 앞에 다시 나타났다. 레온에게 있어 나디아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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