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의 덕질을 떠나보내며
P.67 대화가 불가능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뭘까? 멤버들과 나 사이에 소통은 없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일방적인 시선뿐.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믿었고, 교환도 환불도 불가능할 정도로 멋대로 주물러 버렸다.
사랑을 했다.
8년간의 덕질은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성격상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낯을 가리지 않지만, 계속 만나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낯을 가린다.
내가 가진 애정의 크기는 작은 날도 있고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운 날도 있었다. 그걸 어디에도 토로할 수 없어서 혼자 끙끙 앓으며 시간을 보냈다. 사랑에 대한 크기는 스스로 점점 커졌고, 언젠가부터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맞는지 여러 번 생각하며 어디까지 덕질해야 하나 스스로 눈치를 보기도 했다.
덕질을 이렇게 오래 지속해온 이유는 힘든 내 삶에 단 비를 갖고 싶었다는 것이 가장 크지만, 사실은 유대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도대체 어떤 유대감을 가졌는가? 그것을 말로 설명한다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같은 길을 통해 가고 있다고. 세상이 발달하며 온갖 SNS를 통해 만나온 그들의 모습에서 더더욱 확신했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팬들이 자신의 돈을 쪼개 몇 백장의 CD를 사고, 밤을 새우며 새벽 공개방송에 찾아가고, 피 터지는 티켓팅을 통해 콘서트에 찾아가는 건 그렇게 해서 만들어가는 오늘과 내일을 함께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결국에 저건 다 내가 생각한 진실일 뿐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 천국이기에 함께 걷는 그 행위가 정말 행복했는데, 사실 그는 함께 걷고 싶던 사람도 길도 달랐다. 내가 멋대로 주무른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억울하다. 그 당시엔 정말 함께 하자는 줄 알았으니까. 날 갖고 논거니? 생각할 정도로 깊은 배신감에 휩싸였다. 우리가 함께 부른 그 노래, 그 공간. 행복함을 넘어선 그 따뜻한 열기. 나는 그게 올해도 지속될 줄 알았다. 정말로.
P.160 그래. 이해해서 그런 거지. 그렇게 절실한 애를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되는 그런 거지. 가끔 걔가, 지 감정을 못 이길 때 울고 그랬거든. 그게 얼마나 웃긴 일 이야. 자기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우는 일이. 근데 그게 웃기니까 더 슬프더라. 더 비참하더라구. 그래서 우는 애를 달래주다가 그때 알았지. 아, 진짜 슬픈 거는 웃긴 거랑 똑같구나
지난달은 정말 내가 덕질하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나의 덕질이 빼앗기는 걸 모두가 알아버린 상태에서 받는 건 대부분 동정이었다. 그 날 나는 오래간만에 정말 많은 술을 마셨고, 노래방에서 엉엉 울었다. 내가 그를 포기하는 날이 오다니. 그게 가능해? 얼떨떨하면서도 슬픔이 큰 밤이었다. 스쳐 지나가며 만난 사람들에게 그 새벽까지 계속해서 메시지를 나누며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라고 또 바랐지만 결국엔 현실이었다.
그다음 날엔 바로 다른 친구를 만났다. 나의 솔플 덕질에 큰 힘이 되어준 친구.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감정 소모가 심한 덕질을 해야 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도대체 나는 어떡해야 하는지. 덕질에 대한 짬바가 있는 친구라서 그런지 당장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주변 언저리를 지나가며 이야기를 했다. 고마웠다.
마음을 많이 진정시켰다고 생각했을 때, 어릴 적 덕질을 같이해서 여태 함께 노는 친구를 만났다. 우리의 첫 만남은 잠실 주경기장 3층이었다.
그 유명한 드림콘서트 옆자리에 앉아서 함께 같은 색 풍선을 흔들다가 친해졌고, 이제는 대학 동기라는 신분 세탁 후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함께 영화를 보고, 술을 한 잔 기울이며 나는 정곡을 찔렸다. 마음을 정리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오래 좋아한 그를 한 번에 자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친구는 안타까워했다. 말을 하는 내 표정을 보면서 말없이 술을 들이켜는데, 정말 이게 뭐라고 나는 이렇게 비참해야 할까. 그저 슬펐다.
친한 친구들뿐만 아니라 나의 덕질을 알았던 친척들, 동창들, 회사 사람들, 교회 사람들 심지어는 동생 친구의 어머니까지 나에 대한 동정이 가득한 메시지를 직접 또는 가족을 통해 전달해오곤 했다. 웃겼고 사실은 안 웃겼다.
P.164 너 누가 팬질하는 거 한 번도 옆에서 본 적 없지? 본 적이야 있지. 근데
아니, 내 말은 오빠 앞에서의 모습이나, 그런 절실한 걸 봤냐 이거지. 진짜 눈 돌아간 그 모습을 봐야 이해가 가거든. 인간 속에 저런 게 있구나. 막, 놀라울 정도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니까.
2017년 7월. 여러 가수들이 나오는 콘서트에 친구들과 함께 갈 수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이미 그의 팬이라는 걸 익히 경험했지만, 함께 그가 나오는 공연을 보러 간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사랑에 흠뻑 빠졌다. 그날 옆자리에 앉은 친구들은 내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그 날 따라 맘에 들지 않았던 내 모습은 전혀 없었고 그저 행복한 한 사람만 있었다. 그날 처음 깨달았다. 덕질을 하는 사람의 뒷모습, 옆모습, 앞모습이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다는 걸.
2018년 10월. E를 좋아하는 나와 W를 좋아하는 친구의 덕질 겸 여행. 우리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왔지만 이런 목적을 갖고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은 없다. 어릴 적부터 학원만큼 공연장을 많이 찾은 나와 달리 친구는 늦게 배운 도둑질로 날을 새는 초보 덕후였다. 두 그룹이 모두 나오는 행사는 별로 없기 때문에 함께 즐길 수 있단 것만으로도 굉장히 운이 좋았다. 공연을 보러 가기 전, 그 지역의 덕후 투어를 함께 하고 우리 둘의 사진은 없지만 가져간 아이돌 인형의 사진은 오조오억 장을 찍을 정도로 덕질에 대한 비중이 높은 여행이었다. 친구에게서 아이돌 덕질을 시작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어느 정도 사랑을 깨달은 걸까 생각했는데, 그날 공연장에서 만난 내 친구는 그동안 알아왔던 친구 중 가장 행복하고 살아있는 모습이었다. 아마 나의 그룹이 나왔을 때 나를 본 친구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친구도 나도 버거운 인생에서 한줄기 빛으로 덕질을 택했지만, 사실 덕질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택했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글 속에서 M은 만옥과 함께 덕질하던 그 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인그룹으로 갈아탔다.
미련한 나는 연애를 할 때도 사랑인지 아닌지 몰라도 일단 오래 만나고 본다. 덕질도 그렇다.
한 번에 무 자르듯 아무것도 자를 수 없던 나는 최근 이리저리 아이돌을 관찰하고, 많이 보고 있다.
상암과 부산을 함께 했던 친구도 나와 함께 새 사랑을 찾고 있다. 아니 사실은 찾은 것 같다.
항상 생각한다. 내 멋대로 생각하지 말고 가볍게 아이돌을 즐기자. 하지만 그건 그냥 다짐으로 날아가고 과몰입한 나만 남겨진다.
아마 이번에도 보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결국엔 상처 받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그 순간 내가 살기에 나는 오늘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