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수다 떨기 <투명사회>

by 언더바
P.39 오늘의 투명사회가 동시에 포르노 사회이기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투명성의 이름으로 무제한이 상호 폭로전을 부추기는 '포스트 프라이버시'의 관행 역시 쾌락에 대해서는 오직 파괴적 작용만 뿐이다


친구 1과의 대화 -> 너네는 항상 깊게 생각하더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어?

친구 2와의 대화 -> 네가 보여준 게 포르노가 아니면 뭔데?


전시 사회에서의 우리의 태도.

보이는 것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 어떻게 진행되어가는가. 오늘날 우리의 해석의 태도는 결국 파괴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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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7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헤어지라고 말해도 친구를 끊어내고 남자를 택한 나의 예전 친구에게. 네가 사랑하는 것이 그 남자일까 아니면 온갖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사랑에 올인하는 너 자신일까. 스스로의 코르셋을 조이고 조일수록 나르시시즘도 함께 증가하던 네가 문득 생각났다.


P.101.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P.114 우리는 디지털 매체에 취해 있다. 하지만 이 도취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제대로 평가할 능력은 없다. 이러한 맹목과 마비가 오늘날 위기의 본질을 이룬다.

P.164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스마트폰에서 하나의 치명적인 강제가 생겨난다. 커뮤니케이션의 강제. 사람들은 최근 들어 디지털 기기와 거의 강방적 관계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자유는 강제로 전도된다.


매일매일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던 직장생활과 달리, 요즘엔 몇 시에 자든 몇 시에 일어나든 상관없는 삶을 보내고 있다. 자유를 만끽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무섭다.

내 일상을 이곳저곳에 남기고 있다. 브런치와 인스타그램에는 문화생활을 남기고 있고, 트위터에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와중에도 나를 여러 방법으로 전시하기 위해 인스타그램은 4개, 트위터는 무려 6개의 계정을 사용한다. 모든 것을 한 번에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나를 노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이 하고 있는데,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파놉티콘에 내던지고 서로를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계정에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분명한데 도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가?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는 전시 사회, 진리는 없고 정보만 있는 사회,

이 시간에 카페에 앉아 아이패드로 글을 두드리고, 와중에 스마트폰을 통해 하염없이 타임라인을 새로고침 하는 나.

책을 보며 불편했던 시각의 근원은 그 무엇보다도 이 책이 나를 지목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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