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치유' 중에서
- 라라크루 금요문장-
빅터 프랭클은 유태인 정신과 의사였다.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 세계 대전 중 나치 정권에 의해 죽음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보통 사람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중략)
벌거벗은 채 혼자 조그만 독방에 갇혀 있던 어느 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개달았다. 이후에 그는 이 깨달음을 나치의 간수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었던 자유, 즉 ‘인간 자유의 최후의 보루’라고 불렀다. 프랭클은 나치가 그에게 속한 모든 환경과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있지만 결코 파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내적 정체성(inner identity)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를 현재 속한 환경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관찰자로 여겼다. 외부의 환경이나 나치의 혹독한 탄압이 자신의 내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허용할 때만 가능한 것이며 자신에게는 아직 자신의 내면을 지킬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자극‘과 그 자극에 대한 ’반응‘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으며, 스스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즉 자신에게 닥친 상황들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것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극악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어떤 수치와 굴욕 가운데서도, 그는 이에 반응할 수 있는 선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지, 어떠한 말 못할 고통 중에 있든지 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어떤 사건도 당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한 내면에 있는 자신을 통제할 수는 없다. 자신의 의견과 생각과 태도 그리고 선택할 자유는 언제든지 유일하게 ’당신‘에게만 부여되어 있다.
돈 콜버트 作 <감정치유>193~194쪽
-나의 글 -
대학원 ’상담이론과 실습‘시간,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여러 장의 그림상황카드를 나누어 주시며 마음에 와닿는 그림을 고르라고 하셨다. 나는 초등학생들이 우산을 들고 하교하는 그림을 골랐다. 그림 속 학교 현관 앞에서 우산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한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교수님과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초등학교때의 감정이 소환되는 것 같았다. 교수님은 붉어진 내 눈가를 포착하셨다. “어떤 감정이신가요?” 교수님의 질문에 “새어머니와 사는 것이 힘들었어요...외로웠나봐요. 그래도 잘 살아왔네요” 말하고 웃어버렸다. “슬픈 감정일 때 웃으시나봐요.” 교수님의 말에 속내를 들킨 것 같았다.
’자극‘과 그 자극에 대한 ’반응‘사이의 간격에서 나는 슬픈 감정을 익숙하게 웃음으로 얼른 덮어왔다. 죽음의 실체를 잘 알지 못했던 유년기, 돌아가신 어머니를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채 맞이했던 새어머니. 게슈탈트 상담이론의 용어를 인용하면, 당시의 감정들이 해소되어 배경으로 가지 않고 여전히 전경의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 같다. 그 당시의 감정을 충분히 다루어 주면 좋겠다는 교수님의 조언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타인의 건강하지 않은 자극에 대해 나의 에너지를 소진하며 부정적인 감정을 쌓아둘 필요가 없다. 동시에 슬픈 일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건강한 ’내적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길 같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반응하기 보다 웃길 때는 충분히 웃고, 눈물이 날 때는 충분히 우는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 인생의 고난을 만날 때는 절망을 선택하기 보다 힘듦은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희망을 선택하려고 한다. 자극에 대한 선택적 반응으로 내 남은 길을 걷고자 한다. 선택할 자유는 언제든지 유일하게 ’나‘에게만 부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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