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편집하다
2학기 개학 첫날, 크게 한 일도 없는데 퇴근 후에 파김치가 되었다. 음악이 필요했다. 밝고 따뜻한 에너지가 넘치는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의 연주를 유튜브에서 검색했다. 내가 클릭한 음악은 jtbc 슈퍼밴드 2에 실력파 싱어와 연주자들과 함께 한 'House I Used to Call Home'이란 노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TWsAykOa580&ab_channel=JTBCVoyage
영어 가사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제목이 반복된 가사와 선율, 연주자들의 표정과 무대 디자인의 분위기만으로 노래 가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노래를 들으며 깊은숨을 쉬었다.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음악이 따뜻해서였을까? 그때가 그리워졌다. 그 주 토요일, 아내와 함께 내가 다닌 이대입구 근처의 교회와 초등학교를 돌아보았다.
함께 주일학교 성가대를 했던 친구들과 뛰어놀던 교회 앞마당에서 교회 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교회 사찰 집사님께 혼날까 봐 숨죽이며 교회 종탑 안 사다리를 오르던 기억, 교회 앞마당에서 보이던 대학교에 최루탄이 터져 눈물을 흘렸던 기억, 어울려 놀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교회 옆 작은 집은 그대로 있었다. 여기저기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이는 낡은 집에 옛 친구가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주일학교 성가대에서 이중창으로 불렀던 찬양도 생각났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나는 그때 알토였고, 같은 학교를 다녔던 여학생이 소프라노였다. 그 여학생도 중년이 되었겠지? 여름성경학교 때 늘 불렀던 찬양도 생각났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커다란 보면대에 적힌 가사를 보며 노래 부르던 어린 시절이 햇빛에 비비친 노르스름한 필터 너머로 보이는 것 같았다.
아내와 초등학교 때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10분 정도 걸어 모교에 도착했다. 운동회 때 한참을 내달리던 그 넓은 운동장은 간데없었다. 그저 작은 운동장이 보였다. 마침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빠처럼 보이는 남자가 소년이 다가오자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한 컷. '찰칵'
오늘 사진은 인스타그램 'Rise'필터로 보정하려고 한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편집하려고 한다.
어린 시절 맞이했던 어머니와의 죽음과 새어머니와의 갈등, 아버지의 외로움과 형들의 방황은 배경으로.
오늘 본 아빠에게 다가가는 소년과 반갑게 손을 흔드는 아빠, 교회 앞마당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놀던 모습은 전경으로. 여학생과 둘이 듀엣으로 불렀던 찬양은 배경음악으로 넣으려 한다.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어 매일 죽음을 생각했던 웃자란 소년이 아니라, 깊은 눈망울을 가진 소년으로 나를 기억하려 한다.
돌이켜보니, 그 모든 순간 하늘 아버지께서 보고 계셨다.
어제가 새어머니 생신이었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 한쪽 무릎 수술을 하신 후 보행이 불편하시다. 직설화법을 구사하셨던 어머니. 멀리 타국에 살고 계신 어머니.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아버지와 함께 묶여 있는 카톡 방에 보내드렸다. 아버지는 고맙다고 답글을 보내주셨다. 어머니는 아무 답변이 없으시다. 그래도 괜찮다. 사랑은 이제부터 내가 하면 되니까.
부모님이 이민 가신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보고 싶은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상처는 내가 만든 기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편집한다. 이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만 기억으로 남기려 한다. 이제 나도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은 것 같다. 사랑할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
기억을 편집한다. 더 사랑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