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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에서 잘렸어요.

가리워진 길

by gentle rain

1998년, 뮤지컬 명성황후 미국 공연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단역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다음 일정은 서울과 지방 공연이었다. 수십 명의 배우 중 나를 포함해 단 두 명의 배우가 다음 공연 명단에 없었다. 코러스에서 잘린 것이다. 많이 창피했다. 그러나 금세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공연장에 도착해야 하는 오후 4시 이전까지 뉴욕과 L.A. 두 도시의 명소를 여행서적을 들고 찾아다녔고, 공연이 끝난 밤에는 가장 힙하다는 곳에서 놀았다. 한 번은 공연 도중 허리춤에 찼던 무선마이크를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배우들의 옷을 관리하고 착장을 도와주는 현지 드레서들과 친해져 집에 초대받았다가 밤늦게 숙소에 들어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잘릴만했다.


이후 작은 규모의 갈라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에 참여한 후, 영어학습지 교사로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에게 노래와 율동을 도구삼아 영어를 가르쳤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워크맨으로 영어노래를 틀고 회원인 아이들과 춤추며 노래를 하기도 했다. 회원 어머니 중 한 분은 수업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가기도 했다. 30명이었던 회원이 두 달이 지나자 60여 명이 되어 있었다. 발레복을 입고 수업을 기다리던 어린이, 간식을 계속 내오시던 학부모도 있었다. 영어학습에 진보를 보이는 학생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고,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긍정적인 피드백에 행복했다. 이 시간을 통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교직에 대한 꿈을 품게 되었다.


고 1인 막내가 곧 교과목을 선택해야 한다. 본인의 흥미와 적성검사 결과, 신체적인 특성 등이 일치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아서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어제는 막내와 그동안 학교에서 실시한 CATA 적성검사, 홀랜드 직업적성검사 등의 결과를 보면서 진로에 대해 얘기했다. 막내의 고민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진로를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오늘은 코러스에서 잘리고 가리워졌던 길을 발견하게 된 나의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막내가 50이 되어 상담교사가 된 아빠와 얘기하며 진로에 대한 고민의 크기가 조금은 작아졌으면 좋겠다.


응답하라 시리즈와 슬의생을 통해 음악 취향에 공통분모가 생긴 막내와 고인이 된 유재하 님의 '가리워진 길' 을 함께 들어봐야겠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되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https://www.youtube.com/watch?v=ttZ1Z2F9do4&ab_channel=loveofgod98


가사에서 나오는 힘이 돼주는 사람에 나도 살짝 들어가면 좋겠다.

막내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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