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피 디스크를 포맷하던 시절이 있었다.
드르륵드르륵 — 그 짧은 소음이 끝나면 디스크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깨끗하고, 가볍고, 아무 이력도 없는 상태.
요즘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떨까.
결혼을 안 했더라면, 아이가 없었더라면..
이 선택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 이라고 쓰고 보면 꼭 후회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그게 아니다.
후회는 지나간 것을 아파하는 감정이고, 내가 느끼는 건 그보다 훨씬 조용하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바람에 가깝다.
한 번쯤 아무것도 쌓이지 않은 상태로 서 보고 싶다는, 그냥 그런 바람.
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내가 뭘 원하는지보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가 먼저 떠오른다.
엄마로서, 배우자로서, 자식으로서
역할들이 층층이 쌓이고, 그 아래 어딘가에 원래의 내가 파묻혀 있는 느낌.
시스템 리소스가 꽉 찬 컴퓨터처럼 자꾸 버벅이는 느낌.
그래서일까. 리셋이 당기는 건.
실제로 포맷을 할 수는 없으니, 나는 가끔 다른 방식으로 그 감각을 흉내낸다.
핸드폰을 방에 두고 혼자 카페에 간다.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는 딱 한 시간.
엄마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그냥 커피 마시는 사람으로만 앉아 있는 시간.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임시 파일 몇 개를 지운 것처럼.
책상 위를 다 치워버리기도 한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냥 눈앞이 비어있는 걸 보고 싶어서.
넓은 여백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숨이 트인다.
완전한 포맷은 아니다.
하드 전체를 밀어버리는 게 아니라, 오래된 파일 몇 개를 조용히 휴지통에 버리는 정도. 그래도 꽤 쓸 만하다.
포맷한다고 해서 삶이 실제로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아이는 여전히 내 아이이고, 관계는 흔적을 남기고, 나는 여전히 나다.
포맷 이후에도 같은 프로그램을 다시 깔아야 한다면, 결국 비슷한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 생각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건,
아마 깨끗한 상태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닐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것이 좋은 거겠지.
나는 지금의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가끔은 그냥 싹 밀어버리고 싶다.
그 바람 자체가, 여전히 내가 어딘가로 가고 싶어한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직 살아있다는 뜻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