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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

by Dear Luna

파리에 가면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루브르도, 오르셰도, 베르사유도 아닌 ‘Magasin Sennelier’였다.

2011년 7월에 나는 파리에서 2주 동안 혼자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는 이 화방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그때의 나는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그리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루브르, 오르셰, 오랑주리, 베르사유 궁전을 탐방하며 아름다운 그림들을 볼 때마다 ‘화가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그림들을 그려내는 것인가.’라는 생각에만 집중했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림을 가끔이지만 꾸준히 그리며, 그림이라는 취미에 꽤나 진심인 사람으로 살고 있다.


구스타브 시넬리에는 1887년 루브르 박물관의 맞은편에 이 작은 화방을 열었다. 루브르 박물관과 시넬리에 화방 사이에는 지금도 센강이 흐르고 있다. 고흐, 고갱, 세잔, 피카소 등이 단골이었다고 하고, 1940년대의 어느 날 그는, 물감도 아니면서 부스러지는 파스텔도 아닌 질감을 원하는 피카소를 위해 오일파스텔을 최초로 제작했다고 한다. 색채에 대한 지식을 예술가들에게 조언할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는 시넬리에는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이 화방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오래된 것을 소중하게 가꾸는 태도는 어렵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잊고,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보다 쉽기 때문이다. ”


지난 1월 추웠던 날 저녁, 파리에 도착했다. 긴 비행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어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며 파리의 밤거리를 바라보는 기분은 나른했다. 택시 안에서는 기사님이 틀어놓은 프랑스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고,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의 백색 소음 속에서 이질적인 안도감을 느끼며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했다. 다른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을 뒤척이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고 숙소를 나섰다. 원래는 좋아하는 모네 그림을 다시 보고 싶어 오랑주리 미술관을 가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미술관 예약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에서 나오며 센강변을 걷다 보니 시넬리에 화방 앞에 도착해 버린 것이었다.

화방 오픈 시간은 10시였는데 10분쯤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화방 안의 직원들이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밖에서도 보였다. 동양인 여자가 오픈 전에 화방 앞에서 서성이고 있어서였는지 정각 10시에 문을 열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메르시.”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하고 화방에 들어섰다.

오래된 가게를 보존한 정성이 곳곳에 묻어 있는 작은 화방이었다. 빼곡한 물감과 붓, 작은 노트와 기념품까지 진열된 공간에서 가만가만 숨을 죽이고 최대한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끔 직원들의 대화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들려왔던 그곳에서, 예약한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 머물고 싶었다. 삐걱거릴 것만 같은 가파르고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에도 가 보았다. 다양한 재질의 종이가 많은 2층을 둘러보며 이곳에서 그림 이야기를 나누었을, 지금은 세상에 없는 화가들과 시넬리에를 떠올려보았다. 같은 관심사를 가지며 어떤 방법으로 그림을 그릴지, 어떤 스케치와 채색을 할지를 생각하며 살았을 그들의 청춘과 열정, 그 마음의 끝, 꿈같은 곳에 가까스로 가 닿아 본 것 같았다.

기념이 될 만한 물감과 붓을 사고 싶었다. 2025년의 직원들은 친절했고 설명을 잘해주어 고마웠다. 울트라 마린 블루 색상의 아크릴 물감은 찾았는데 유화 물감은 보이지 않아서 직원에게 물었더니 자신을 따라오라며 카운터 근처의 큰 서랍장 앞에 가서 서랍을 열어 보여주었다. 서랍장 안에는 칸칸마다 다른 색깔의 유화물감이 들어 있었다. 여건이 된다면 그곳의 물감을 하나씩 색깔별로 사고 싶었지만 나는 파리를 곧 떠나야 하는 여행자이니, 그 물감들을 다 살 형편이 안되었다. 게다가 유화 물감은 낱개 하나에도 너무 비싼 가격이어서 결국 유화 물감은 코발트블루 hue를 샀다. 그걸 산 이유도 계산서를 보고 놀라는 내게, 직원이 유화 물감은 hue를 사라고 권유해 준 덕분이었다. 차분하고 다정한 직원 덕분에 물감 두 개와 붓 한 자루, 얇고 쓰기 아깝게 생긴 노트를 시넬리에 화방에서 샀고 한국에 가져왔다.

나는 시넬리에에서 산 물감과 붓을 그림 작업용 트레이가 아닌 책상 서랍에 따로 넣어두고 가끔 열어보며 생각한다.

‘ 언젠가 푸른 무언가가 그리고 싶어질 때 먼저 울트라 마린 블루 아크릴 물감으로 칠한 다음, 하루를 말리고 유화 물감 코발트블루 휴를 칠해야지. ’


그날의 시넬리에 화방, 그곳에서 가까스로 닿았다고 느꼈던 화가들의 숨결과 설렘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잊지 않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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