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파리에서 기억에 남는 장소는 셰익스피어 서점이었다. 그때는 서점 2층에 피아노가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 어떤 남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방문객이었는지 서점 관계자였는지 모르겠지만 책이 가득한 공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그의 곱슬머리 금발이 인상적이고 멋있어서 한참을 본 기억이 난다.
아직 피아노는 있었다. 하지만 연주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고, 서점 2층에 꽂혀 있는 헌책들은 더 이상 판매하지 않았다. 아직도 내 서재 한켠에는 그때 산 헌책이 꽂혀 있다. 낡고 오래된 자주색 표지의 책이 예뻐서 프랑스어를 읽지도 못하면서 기념으로 사 왔었다.
붐비는 손님들 덕에 서점 입구에서는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야 하고, 들어오라는 직원의 말이 있어야 서점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시스템이 바뀌었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서점 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가 없다. 예전에 나는 곱슬머리 남자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던 것 같은데.
한강 작가의 책이 있냐고 점원에게 물었더니 그는 잠깐 검색을 해 본다. 그러더니 없다고 말하며 되돌아서서 분주하게 일을 한다. 방문객들은 줄을 서서 서점에 들어왔고 책보다는 에코백을 많이 사는 것 같았다. 나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로고가 적혀 있는 에코백을 샀다.
서점은 그대로 있었지만 달라졌고, 달라진 듯 하지만 옛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때의 나는 아니지만,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마레 지구에서 길을 잃었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엔조이 파리’를 읽으며 여행 준비를 했고 책의 뒤쪽에 붙어 있던 지도를 잘라내어 크게 펼쳐 보면서 파리에서 길을 찾아다녔다. 책에 소개된 내용 중 마레 지구에 있는 빈티지샵에 가보고 싶었다.
그 당시 내가 머문 숙소는 파리 외곽에 있던 한인 민박이었는데 15구 정도의 위치였던 것 같다. RER B를 타고 공항에서부터 찾아갔었고, 시내까지 나오려면 전철을 20-30분 탔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레 지구는 작고 예쁜 골목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내가 가고자 했던 빈티지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근처라고 생각되는 비슷한 길을 몇 번 되풀이하여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었다. 비를 피하려 후다닥 앞에 보이는 갤러리에 뛰어들어가 뜻하지 않게 예쁜 그림을 감상하고 나오기도 했었다. 걷다가 너무 다리가 아파 노천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생각했다. 분명 이 근처인데 한 번만 더 돌아보고 없으면 숙소로 돌아가자. 못 찾으면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애쓰지 말자. 아름다운 마레의 길을 걷는 이 시간을 그냥 즐기자.
마음을 다잡고 카페에서 나와 다시 마레 지구를 걸었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가게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빈티지샵을 찾으려고만 하다가 다른 아름다운 곳들을 보지 못할 뻔한 것이었다.
‘꼭 가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왜 그랬을까.’하며 걸어가던 중 거짓말처럼 눈앞에 내가 찾던 빈티지샵이 나타났다.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그 앞을 몇 번이나 지나갔었다.
그렇게 찾아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마음을 내려놓으니 보였다. 마음은 시각을 지배하기도 하고, 조급함은 많은 것을 그르친다는 것을 그때 조금 깨달았다. 작은 것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숨을 크게 쉬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야 속에 커다란 그림이 보이고, 그러다 보면 그림 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소재들이 저절로 인사를 건넨다는 것을.
그 빈티지 샵에서 나에게 딱 맞는 가죽 코트와 가죽 가방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샀다. 기분이 좋아져서 마카롱을 사 가지고 숙소로 돌아가 민박집 사장님과 옆방 손님들과 같이 먹었다. 다들 내 코트를 부러워했고, 특히 민박집 여사장님이 코트 가격을 듣더니, 파리행 항공권 가격을 번만큼 잘 샀다고 하시며 본인도 가고 싶다고 샵 위치를 구체적으로 물어보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살이 쪄서 코트가 꽉 낀다. 가방은 안쪽이 헐어서 수선집에 가서 안감을 다시 만들었는데, 그 당시 가방 가격보다 비싸게 수선비가 들었다.
마레 지구는 많이 변해 있었다. 몇 군데 빈티지샵을 가보았는데, 옛날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좁은 골목은 넓어졌고, 작고 예쁜 가게들보다는 유명한 브랜드샵, 편집샵들이 많았다.
빈티지샵을 찾아다니던 옛날의 내가 이젠 그곳에 없다. 마레 지구를 대표하는 메르시 매장 앞에서 쇼핑백을 들고 트렌드 마크인 빨간 자동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나도, 예전의 나는 아니다.
인파로 뒤덮인, 왠지 멀미가 날 것 같은 주말 오후의 마레 지구에서 벗어나고자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파리 외곽의 한인민박이 아닌, 샤틀레역 3분 거리의 코지한 호텔로.
지도를 보며 좁은 골목을 걸어 다니던 그때의 내가, 그때의 마레지구가 그리워져서 호텔에서 혼자 와인을 마셨다. 파리의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