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였던 남편과 나는 아버님의 죽음 이후,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삶의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나는 전업주부로 남았다.
그 시기, 세상은 정말로 우리 셋만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과 나, 그리고 딸.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남편의 가족이라는 거대한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어느새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누구도 우리를 같은 편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런 외로움 속에서 오히려 우리 가족은 더 단단히 묶였다.
붙잡지 않으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결속력,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누나들의 공격은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말들은 정확하게 상처가 될 곳을 겨냥했고, 그때마다 남편과 나의 마음은 조금씩 금이 갔다.
우리는 서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알았다.
그 눈동자 안에 쌓여 있던 피로와 절망을.
남편이 견디던 것은 가족에게서 밀려나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견디던 것은, 그 남편을 지켜보아야 하는 아내의 무력함이었다.
그 고통은 설명할 수 없이 조용했고, 묵직했다.
밤이면 우리는 오래 대화를 나눴다.
무언가 해결하기 위한 대화라기보다는, 그날을 살아낸 마음을 확인하는 대화였다.
말을 해야만 서로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시기, 딸의 어린이집을 옮겨야 할 상황이 겹쳤다.
집 근처 국공립 어린이집 대기 순번은 200번대였다.
그 숫자는 사실상 기다릴 이유가 없음을 말해줬고, 우리는 결정을 내렸다.
“이사하자.”
건물 관리는 전문 업체에 맡기고,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자.
그 말은 도망이 아니라, 생존의 본능에 가까웠다.
남편과 아파트 매물을 알아보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전화가 걸려왔다.
어린이집 상담 확정, 등록 가능.
포기했던 대기 번호가 갑자기 열렸다.
그 순간, 둘 다 한동안 말을 잃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일련의 흐름이 이유 없는 우연처럼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사를 멈추고 다시 이 건물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선택이 옳았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는, 마치 아버님이 조용히 남긴 마지막 메시지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라.”
그렇게 들렸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