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디언 GPS가 날 거부한다

by Ms Lara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무렵의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처음 가는

목적지를 향할 때면 나만의 루틴이 있다.

운전석에 앉아서 주소를 직접 입력하는 것.


남들은 운전 중에 멋지게 음성 인식을 쓰기도 하지만

나한테 그건 여전히 쉽지 않은 숙제다.

아무리 또박또박 말해도

내비게이션은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무엇보다 내 차는 운전 중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GPS 입력이 제한된다.

한마디로 출발 전에 완벽하게 세팅하지 않으면

길 위에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그날도 그렇다.

둘째 아들은 친구의 생일 파티 준비로

일주일 전부터 한껏 들떠 있다.

우리는 월마트에 들러 아이가 가장 갖고 싶어 했던

'베이블레이드(Beyblade)' 배틀 세트를

선물로 골랐다.

내 눈엔 그저 비싼 플라스틱 박스일 뿐인데

아이는 이게 왜 그냥 플라스틱이 아닌지

돌아가는 원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늘어놓는다.


사실 생일 카드가 꽤 비싸다 보니

일주일 전부터 미리 생일 카드를 만들라고

숙제도 주었는데 아이는 그것조차 신이 났다.


파티든 여행이든 막상 그날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즐거운 법이라는 걸

아이의 끊이지 않는 수다를 보며 실감한다.


"엄마, 에반이 이거 보면 진짜 좋아하겠지?"


라며 연신 쫑알쫑알 거리며 웃는 아이 때문에

차 안은 이미 파티장이나 다름없다.


그 기분 좋은 설렘을 안고 운전대를 잡았는데,

아! 주소 입력을 깜빡했다.

차를 길에 세우고 입력하기엔 늦을 거 같아

나도 모르게 늘 네비와 대화하는 사람처럼

익숙한 듯 말을 건다.


"Navigation! Address, 128 Roberstdale Road"

*가상의 주소입니다*


역시나다. 이 캐네디언 GPS는 내 정직한 발음을

단칼에 거절한다.

운전 중이라 손은 쓸 수 없고 마음은 급해진다.

혀를 최대한 굴려보기도 하고,

안 되겠다 싶어 단어를 하나하나 끊어서

또박또박 뱉어보기도 한다.


어느새 내 입술은 자동차 스피커에 바짝 붙어 있다.

기계가 내 목소리를 못 듣는 게 아니라

발음을 못 알아먹는 건데 마음이 급하니

몸이 먼저 마중을 나간 꼴이다.


그때 뒷좌석 '사장님' 자리에 앉아 있던

아들이 툭 던진다.


"엄마, 내가 해볼게."


아이는 뒤에서 대충 웅얼거리듯

"128 Roberstdale Rd”이라고 내뱉는다.

그런데 이 배신감 넘치는 GPS가 찰나의 웅얼거림을

기다렸다는 듯 덥석 낚아채는 게 아닌가.


순간 마음속에서 망치로 화면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아, 진짜 빈정 상한다!'


내가 스피커에 입술까지 붙여가며

정성을 다할 땐 못 들은 척하더니

공중에서 흩어지는 저 아이의 게으른 발음은

어쩜 저리 찰떡같이 알아듣는단 말인가.

정성 가득한 내 '또박또박'보다

아이의 성의 없는 '웅얼거림'이

이 나라 기계에겐 더 익숙한 신호인가 보다.


아들을 파티장에 내려주고 기다리는 두 시간 동안,

나는 혼자 차 안에서 다시 연습을 시작한다.


"Rrrr... Roberstdale..."


아무도 없는 차 안, 빈 스피커를 향해

혀를 굴려보는 이민자 엄마의 오후.

다음번엔 꼭 출발 전 주소를 찍어 넣으리라

다짐하며 입술 근육을 다시 바삐 움직여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Lara and 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