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그리고 iloveyou
고등학교 때 큰맘 먹고 엄마 몰래 삐삐를 샀다.
들키지 않으려 늘 진동으로 해두었건만
소머즈급 청력을 가진 엄마의 귀를 피할 순 없었다.
결국 딱 걸렸다.
그렇게 내 소중한 첫 삐삐는 다시 볼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울지도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조금 있다가 다시 사야지!
다짐했을 뿐.
왜냐하면, 나는 쿨한 X 세대니까!
그 시절엔 삐삐 없이는 친구들과 약속이
성립되지 않았다.
“이따 삐삐 쳐!” 한마디면 모든 게 통하던 시절.
친구가 남긴 음성 메시지 하나 확인하려고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줄을 서던 날들,
거실 전화기는 늘 뜨거웠고
우리들의 수다도 그만큼이나 뜨거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만의
숫자 암호도 생겨났다.
7942 친구사이
486 사랑해
8282 빨리빨리
100 돌아와줘
1004 천사
호출기에 찍힌 숫자 몇 개만 보고도 서로의 진심이
선명하게 읽히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X세대인 나는 어느덧 Z세대 딸을 둔
엄마가 되었다.
딸은 삐삐 대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전화 대신 화상 통화를 한다.
어떤 날은 딸의 베프, 에쉬가 우리 집에
같이 사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도록
그녀들의 수다 역시 아주 뜨겁다.
게다가 딸이 보내오는 문자는 거의 암호 수준이다.
이건 외계어인가 싶다가도
아! 이게 바로 요즘 애들의 언어인 ‘Z-래어’ 구나 싶다.
mom can u pick me up after school??
nvm dw, i’ll just walk lol
omg btw i literally ate that math test fr fr
i thought i was gonna fail but i actually clutched up slay
wait nvm can u actually come?
like rn??
pretty plz~~~
ily lol
대체 이게 다 뭔 소리여?
이 나이에 ‘Z-래어’ 공부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삼 남매 키운 짬밥이 어디 가진 않는다.
눈대중으로 대충 감을 잡아보니 이런 뜻이다.
“수학 시험 잘 봐서 기분 최고니까
지금 당장 데리러 와줘!”
딸의 들뜬 기분에 나도 Z세대에 끼고
싶은 마음을 담아 쿨하게 답장을 보냈다.
kk (okay okay)
rn 답장을 보내자마자 X세대 엄마는 8282 옷을 챙겨 입고 486 하는 7942 같은 딸을 데리러 99 한다. lol
삐삐를 치던 X세대와 스마트폰 ‘Z-래어’로
마음을 주고받는 Z세대의 일상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방식만 달라졌을 뿐
서로가 전하는 진심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