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를 찾기까지
캐나다라는 낯선 땅에서 세 아이를 키우며 보낸 시간들. 전업주부라는 이름표는 어떤 날엔 훈장 같았지만, 또 어떤 날엔 나를 가두는 작은 감옥 같았다. 오피스로 출근하는 친구들의 소식을 접할 때면, 괜히 냉장고 문을 조금 더 세게 닫곤 했다.
남편은 늘 말했다. “아이들 키우는 당신이 자랑스러워. 고마워.” 그 말이 진심인 걸 알면서도, 거울 속 나는 점점 ‘누군가의 엄마’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발전 없는 ‘아줌마’라는 타이틀 뒤에 비겁하게 숨어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막내가 킨더가든에 입학하던 날,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제 내 시간이 생겼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선물처럼 떨어진 여섯 시간.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유는 곧 불안이 되었다. 나는 다시 진로를 고민하는 고3 수험생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이제 뭐 하지?’
영어는 여전히 높은 장벽이었고,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앞으로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이 셋을 키운 게 바로 너의 경력이야”
방황하던 나에게 뜻밖의 길을 열어준 건, 예전 LINC 프로그램에서 만난 선생님이었다. “Lara, LINC 데이케어에서 일해 보는 건 어때?” 경험도 없고 이력서에 쓸 말도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나에게 선생님은 단호하지만 따뜻하게 말씀하셨다. “아이 셋을 키워낸 것, 그게 네 가장 위대한 경력이야. 넌 이 일을 좋아하게 될 거야.”
그렇게 시작된 나의 캐나다 첫 직장. 아이들의 눈은 생각보다 더 반짝였고, 작은 손들은 매일 나를 찾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나의 진심을 알아본 슈퍼바이저 크리스티나는 내게 더 큰 성장을 권했다. “Lara, ECE를 공부해 봐. 넌 더 성장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해.”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전문대학 유아교육과에 입학했고, 3년의 고군분투 끝에 마침내 Registered ECE(유아교육교사)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나 자신이 대견했다.
즐거움 뒤에 찾아온 ‘언어’라는 그림자
하지만 현장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전문직 교사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내성적인 성격과 언어의 한계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한 반에 20명 가까운 아이들을 돌보는 체력적 부담보다 더 힘들었던 건 학부모와의 소통이었다.
‘내 발음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내 영어가 부족해서 오해가 생기면?’
스스로를 향한 자격지심은 즐거웠던 일터를 다시 두려움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사랑스러웠지만, 교실 전체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앞에서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EA(Educational Assistant), 나를 다시 발견하다
그렇게 2년을 버티듯 일하던 어느 날, 새로운 길이 보였다. 바로 EA(교육 보조사 – 특수교육 지원)였다. 다수를 이끄는 카리스마보다 도움이 필요한 소수의 아이들 곁에서 세밀하게 살피는 역할.
그곳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의 내성적인 성격은 단점이 아니었다. 나는 잘 듣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깊이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경청과 관찰, 그것이야말로 이 일에서 가장 필요한 핵심 능력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 실수도 하고,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세 아이를 키운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전업주부였던 날들은 경력 단절이 아니라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 ‘준비 기간’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 ‘누군가의 엄마’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선생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길을 묵묵히 찾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다. 나는 내 직업이 자랑스럽다. 아니, 이제는 내 길을 직접 만들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