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의 고군분투, 공포의 스토리 타임
공포의 20분, 스토리 타임
ECE로 일하며 마주한 가장 큰 벽은 다름 아닌 '스토리 타임(Story Time)'이었다. 20여 명의 아이들 앞에 앉아 책을 읽어 주는 시간. 한국인에겐 평생의 숙제 같은 th, l, r, z 발음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이들의 집중력을 붙잡으려면 구연동화 작가처럼 목소리도 변주하고 생동감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나에게 그 시간은 마치 사자 무리 앞에 던져진 초식동물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특히 예상치 못한 책을 아이가 들고 올 때면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생소한 프랑스식 이름이나 판타지 속 지명이 나오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도저히 발음할 엄두가 안 나는 단어 앞에선 바쁜 척하며 파트너인 아니엘에게 슬쩍 책을 넘기기도 했다.
"자신감을 가져, 라라! 정답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줘"
나의 멘토이자 구연동화의 장인, 아니엘은 나의 머뭇거림을 단번에 눈치챘다. "라라, 자신감을 가져! 넌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왜 스스로를 믿지 못하니?"
아이들의 눈을 초롱초롱하게 만드는 아니엘의 연기력을 보며 나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주인공 이름 발음이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하자, 아니엘은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발음이 안 되면 이름을 바꿔버려! 네가 말하기 편한 걸로.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주인공의 이름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가야."
'청진기(stethoscope)'라는 단어 앞에서 쩔쩔맬 때도 그녀는 윙크하며 말했다. "그냥 하트 모니터(heart monitor)라고 해. 그러면서 이게 심장 소리를 듣는 거라고 설명해 주면 되잖아."
아, 이것이 경력의 무게구나. 정답에 갇혀 있던 내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집에서 거울을 보며 수없이 연습했다. 로버트 먼치(Robert Munsch)의 책들을 목소리를 바꿔가며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공포스럽던 스토리 타임은 서서히 아이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웃는 행복한 시간으로 변해 갔다.
"라라, 직접 말해 봐! 넌 할 수 있어"
언어의 장벽은 사소한 순간에도 불쑥 나타났다. 한 아이가 열이 나는 것 같아 오피스에 전화를 걸었을 때였다. '체온계'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혹시 그거 있어? 온도 체크하는 거... 조그만 거..."
내 설명을 듣던 오피스의 안젤라가 단호하지만 따뜻하게 말했다. "라라, 말해 봐! 넌 할 수 있어. Thermometer(써모미터)!"
수줍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써모미터..."라고 내뱉자 수화기 너머로 환호성이 들려왔다.
"Yes! 라라! 당장 가져다 줄게!"
그 환호성은 마치 내가 에베레스트라도 정복한 듯한 성취감을 주었다.
나를 성장시킨 소중한 퍼즐 조각들
나의 서툰 영어와 자격지심을 비웃지 않고, 내가 스스로 단어를 내뱉을 때까지 기다려 준 사람들. 아니엘과 안젤라는 단순히 동료를 넘어, 내가 캐나다 사회의 일원으로 정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퍼즐 조각들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소통의 본질은 유창한 발음이 아니라 아이들을 향한 진심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나는 현장에서 몸소 배웠다. 나의 성장의 한 페이지를 기꺼이 채워준 그녀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이제 나도 누군가 단어 앞에서 머뭇거릴 때, 안젤라처럼 환호해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