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둘째 주 수요일, Snow day

흔들리지 않는 아이의 하루

by Ms Lara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이곳에서는 가끔 ‘스노우 데이(Snow day)’가 찾아온다. 폭설이나 결빙, 극심한 한파 등 위험한 기상 조건 때문에 학교가 공식적으로 휴교하거나 스쿨버스 운행을 중단하는 날을 말한다. 밤새 눈이 깊게 쌓이거나 프리징 레인이 내려 도로가 유리판처럼 얼어붙으면 아침 일찍 스쿨버스 캔슬 소식이 뜬다. 아이들의 등하교를 책임지는 노란 버스가 일제히 멈춰 서는 날이다.


옆 동네 퀘벡주는 버스가 캔슬되면 아예 문을 닫는 학교도 있다지만 내가 사는 온타리오주는 웬만해서는 학교 문을 연다. 다만 부모님이 직접 아이들을 등교시켜야 하기에 이런 날 교실에는 평소 인원의 절반도 채 모이지 않는다.


덕분에 교실 분위기는 평소와 사뭇 다르다. 팽팽하던 수업의 긴장감 대신 느슨하고 말랑한 공기가 흐른다. 색칠 공부를 하거나 영화를 보고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마인크래프트 에듀케이션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아이들은 소곤소곤 수다를 떨고 웃음소리가 교실을 채운다. 말 그대로 ‘Fun day’다.


하지만 내가 담당하는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special needs) 아이들에게 스노우 데이는 조금 다른 의미다. 특히 루틴(Routine)이 깨지는 것 자체가 커다란 스트레스인 아이들 중에서도 J에게는 더욱 그렇다.


J에게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하루의 순서'는 단순한 일정이 아니라 아이를 지탱해 주는 확실한 이정표다.


첫 번째 블록: Gym/French


두 번째 블록: Math


이 약속된 순서가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갈 때 J는 비로소 세상을 안전한 곳이라 믿는다. 그런데 스노우 데이가 되면 그 일과의 경계가 갑자기 흐릿해진다. 늘 보던 친구들이 보이지 않고 익숙한 수업 대신 낯선 게임이나 영화가 등장한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선물 같은 깜짝 이벤트겠지만 J에게는 익숙한 퍼즐판의 조각들이 갑자기 뒤섞여 버린 것 같은 불안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평소 스케줄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 않은 한, 아이의 평범한 하루를 지켜주기 위해서다.


지금 교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모여 보드 게임을 하고 있다. 그 옆에서 J는 평소 늘 하던 대로 더하기 문제지를 들고 와 내민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루틴대로 문제지를 내미는 J를 보면 대견함보다 마음 한구석이 먼저 씁쓸해진다. 즐거운 소란함 속에서도 홀로 숫자 칸을 채워 나가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J가 세상을 마주하는 방식임을 알기에 나는 그 씁쓸함을 누르고 아이의 평범한 루틴을 함께 지켜주기로 한다.


열심히 문제를 풀면서도 J의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인다. 아마 마음은 이미 다음 루틴인 ‘레인보우 룸(J가 좋아하는 아늑한 휴식 공간)’에 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J는 자신만의 규칙을 잘 안다. 이 학습지 한 장을 끝내야만 다음 칸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드디어 마지막 문제의 답을 쓰고 J가 당당히 요구한다.


"All done. Finished! Rainbow Room!"


J의 얼굴에 아주 작은 만족감이 번진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루한 학습지 한 장일뿐이겠지만 오늘 J에게 그것은 온 도로를 얼려버린 프리징 레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지켜낸 '변하지 않는 하루'의 증거였다.


창밖에는 여전히 차가운 비가 내리고 나무는 얼음옷을 입고 도로는 얼어붙어 있다. 하지만 교실 안 J의 책상 위에는 정해진 순서대로 묵묵히 과제를 마친 아이의 온기가 조용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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