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사고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아님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던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뜻하지 않게 사고는 일어났다.
그리고 도망쳤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더 멀리 아무도 날 볼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때론 도움이 되니까.
어쩌다 보니 20대 초반은 온통 도망치고 상처 입고 상처 주고 울고 숨었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그때의 만남과 인연들은 내게 크게 내상을 입혔다.
때문에 사람이라면 지긋지긋했다. 누구도 못 미더웠다. 언제 어떻게 뒤통수를 맞을지 몰라 항상 경계 태세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나, 원래 알던 사이인 사람을 만날 때에도, 이 사람이 나를 어떤 식으로든 상처 주거나 배신할까 봐 마음의 거리를 두었다.
나답지 않았다. 답답했다. 상처 준 사람이 잘못인데 왜 내가,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억울하다가도 상처를 받는 내 잘못인가 싶었다.
내 안에서 극복하지 못한 미해결과제가 자꾸 나를 괴롭게 하고 내 주변 사람들도 내가 못살게 구는 것 같아 자꾸만 작아졌다.
나를 탓할 수도 없고, 그동안의 인연을 탓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만나지 말았어야 했나 생각하는 내가 싫었다.
이번 겨울은 그 모든 기억과 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그렇게 대학에서의 인연도, 기억도, 감정도 모두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사다난했지만 결국엔 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만 겨울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교문을 나올 때, 처음으로 그 교문으로 들어설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입시만을 보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려 온 고등학교 시절이 무색하게 입시에 대차게 실패했던 열아홉 겨울이 떠오른다.
너무 서러운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고 너무 쪽팔려서 방에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울었다.
솔직히 그 교문을 들어설 때의 감정도 '난 너희들과 달라'라는 잘못된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인정할 수 없었다. 쪽팔렸다. 너무 쪽팔려서 쪽팔리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쪽팔렸다. 매일 이 문을 드나들어야 한다는 사실도, 내가 이 학교의 학생이라는 사실도.
'이 학교를 절대 졸업하지 않으리라.'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결국에는 그 문으로 사회를 향해 나왔다. 자랑스럽고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 반, 쪽팔리고 지쳐버린 마음 반으로.
액셀을 밟을수록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달리는 게 아니라, 뒤로 달렸다. 사고처럼 괴로웠던 기억과 감정, 나를 상처 입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스멀스멀 떠올랐고, 나를 짓눌렀다.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스물넷. 아니 어쩌면 열아홉과 그 이전에 해결되었어야 할 감정들과 조우했다. 마구 밀려오는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단순히 학교를 졸업하는 것만으로는 거기서 만난 인연들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그동안에 곪아버린 상처들이 없던 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도망쳤다.
조금 비겁하고 지질하지만, 일단 살고 보는 게 우선이었다.
난 너무 지쳐 있었다. 사람이라면 다 지긋지긋할 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기 전까지 잠시 도망치기로 했다.
나의 스물 다섯 은둔 생활이 시작되었다. 깜깜하고 사무치게 외로운 고독한 나날들이 반복됐다. 살아남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