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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유정 Mar 20. 2023

사람과 예술이 하는 일

내게 너무 다정했던 우울에게


질투했다.


주파수가 딱 맞는 사랑을 듬뿍, 담뿍 받고 자라, 누가 봐도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그런 아이들을 보거나, 함께 있으면,

맑디 맑고, 둥글둥글하고,

꼬인 데 없이 선해서

조금도 미워할 수 없었다.


오해하거나 곡해할 만한

거리와 틈이 없었다.

단 1mm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까.

그 곁에서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가지 못했다.

오히려 곁을 배회했다.



결국엔 옹졸하고 유치한 나를 염오 하게 됐다.


그 엇비슷한 사랑을 가져 본 적도, 받아 본 적도 없어, 치욕스러웠다.

게다가 내 인생이 왠지 가련하게 느껴져, 배알이 꼴렸다.


뒤틀리고 모난 데가 있는 심성이 꼭, 발작을 했다.

자존심이 상해, 겉으로 티도 못 내고,
하염없이 부아가 치밀었다.


억울했다.

겨우 '사랑' 그거 하나 때문에.


왜 나는 이토록 절망 속에 살아야 하나.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랑받고 자랐다.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서로 너무도 괴롭지만,
어딜 봐도 사랑이긴 한, 그런 사랑.


외롭고 혼란스러웠던 어린 시절,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뼛속 깊이 저주하고 혐오했다.


'너무 끔찍하게 괴로워서 살고 싶지 않아'

'그래도 나는 내가 아직은 너무 불쌍하고 애틋해. 이렇게 죽기엔 너무 억울해. 너무 살고 싶어.'

사이를 촘촘하게 오갔다.


내가 나를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끊임없이 노려 봤다.

얼마나 열심히 째려봤는지, 매일 눈물이 줄줄 흘렀다.



돌아보면, 내겐 '좋은 어른'이 필요했다.


문동은한테도, 이지안한테도
알고 보면 '좋은 어른'이 있었던 것처럼
내게도 '좋은 어른'이 필요했다.



힘들 때,
나 이러이러한 일을 겪어서
너무 아프고 힘들다고,

질투 날 때,
걔가 이래서 질투 난다고,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신이 나서 가장 먼저 전화하거나,
달려가서 알려 주고 싶은



좋은 어른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그래서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어른이란 어른은 모두 분노의 대상이었다.

더 나아가 세상과 세계를 향해 쉴 틈 없이 분에 했다.


동시에 의문 투성이었다.

그들은 왜 항상 내 편이 아닐까.
왜 항상 나를 평가하려 하는 걸까.
내 신변의 위협을 막아주고,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을까.
왜 책임감으로만 나를 대하는 걸까.
왜 나는 늘 그들의 비위와 눈치를 살피며,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아등바등 아득바득 전전긍긍해야 하는 걸까.


결국 아무리 물어도 답할 수 없는 질문들만 잔뜩인 채,


가혹할 만큼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마음의 고향 하나 없이, 어른이 됐다.

'어른'이라기엔 아직 나는 그 시절 어딘가에 이따금 머물러 있기도 한다.

'성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나이는 먹는데, 나는 종종 어린 나와 마주한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본다.

왈칵 눈물을 쏟고 다시 어른이 된다.


정확히는 애써 어른인 체한다.

'~한 척', '척'을 잘하게 되면 진짜 어른이 되는 거라는 말도 있던데,
나는 한참 걸릴 것 같다.


얼마 전까지도 내가 받은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느낀 건, 집착과 강한 책임감이었다.

수없이 질식할 것 같은 공기 속에 잠식됐다가 숨 막히기 직전에 빠져나왔다.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사랑 같은 거 죽어서도 하지 않겠다고.
결혼 같은 것도, 아이도, 가정도 절대 갖지 말아야겠다고 수천만번은 다짐했다.


얼마 전,


어느 책이었을까, 드라마였을까, 어떤 작품을 보다가 '책임감'도 사랑의 일종이라는 대사를 봤다.


"자그마치 10달을 고생해서
생사를 오가면서 너를 낳고,

잠도 한 숨 못 자 가면서
너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그렇게 몇 년을 '나'라는 사람 없이
너를 키워내고,

아침잠도 많은데
그 새벽에 일어나서 성실하게 일하시는 건,

 네 입에 뭐라도 하나 더 먹이고,
더 좋은 거 입히고 싶어서야.

왜겠어.
널 사랑하니까!

책임감도 사랑이야.
그런 방식으로 너를 사랑하시는 거야."


이 장면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서글퍼져서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를 보듯이 한참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그런 방식으로 나를 사랑..? 책임감도 사랑..?'

두 구절을 반복재생한 듯이, 입가에 중얼거리며.



몇몇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원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엄마도, 아빠도 엄마, 아빠가 처음이라
힘겹고 무섭고 서툴렀을 순간들이  너무도 많았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그 와중에도 나를 챙겨 주던 말, 태도, 강한 책임감.

그건 존경할 만한 사랑이었구나.



성인이 되고 나서,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엇갈린 사랑에 숨 막히고,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뱉어낸 말들은

엄마한테 비수가 되었을까,

죄책감이 되었을까.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고마워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대충 소매로 훔치며
엉엉 울었다.



그렇게 아주 최근에야,


'내가 받은 것도 사랑이었구나.' 깨달았다.
'나도 받은 게 아주 많았구나.' 하고.
'나도 사랑받은 아이였구나.' 눈뜨게 됐다.


사랑이 사랑이 아닌 동안,


내겐 너무나도 다정한 우울이 있었다.
어찌나 다정한 지 꼭 다정이란 이름이 우울인 것만 같았다.


우울만 꾸준히도 내 곁을 지켰다.

심지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에도 우울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다정한지.

친구처럼, 연인처럼 내 곁을 지켰다.

우울에게서 다정함이 뭔지 배울 지경이었다.


때로는 다정한 것들이 우울이 되어, 

먼지처럼 다닥다닥 들러붙다.


그럴 때면,

다정이 우울인지, 우울이 다정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다.



사랑 다정도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 본 사람이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사랑받고 자랐지만,


사랑도 다정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므로,
자주 훔쳤다.


책에서, 음악에서, 드라마에서, 웹툰에서.
또 다정한 친구들에게서.


그렇게 다정을 배웠다.


우울이 다정하게 굴어,

회색빛으로 찌들었던 나는

점차 색깔이 입혀졌다.


상실, 하락, 멍함, 자책,
혐오, 오해, 곡해, 애증

어두움에도 여러 빛깔이 있고,


행복, 사랑, 애정, 다정,
애착, 존경, 경애, 정열

밝음에도 다채로운 색깔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받지 못했다.'라고 느꼈던 지난날을 후회하진 않는다.


충만한 삶을 살았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거고, 쓰지 못했을 테니까.


배반과 배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든든한 '믿을 거리',

글쓰기를 사랑하게 된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생은

충분히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만약 사랑을 갈망하며 살지 않았다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이토록 오만 가지인지 이론적으로만 알았을 거다.


날 때부터 부자가 ''가난'은 이런 거잖아.'라고 어림짐작하고 상상하는 것처럼.



나는 이제 내가 불쌍하지 않다.


죽음을 생각하는 날도 극히 드물다.


정말 다정하고 섬세하고 세심한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몇 번을 부정하다가,

'내게도 다정함이 어느새 스며들어 있구나.'

인정하게 됐다.



더 글로리의 강현남이


 "나는 매 맞고 살지만, 명랑한 년"
이라고 했던 것처럼,


나는 한 때

끝없이 우울했지만,


동시에

강인하고, 단단하고, 씩씩했다.


그리고 이젠 다정하다.


다정함이 더 강한 힘을 가졌음을 안다.

강할수록 오히려 따뜻하단 걸 안다.



이제는 다정을 배운 덕분에,


그 마음을 나눠 준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촉촉하고 감사한 지를 생각한다.


어릴 때의 나처럼

생사의 경계를 눈물 나도록 뚫어져라

째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나눠 주고 싶어서.


당신은 사랑받아 마땅하고,
자기 자신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당신도 누군가에겐 사랑받고 자랐다고.


그리고 누군가에겐 꼭 '좋은 어른'이 되어 주고 싶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좋은 어른'이 꼭 되어 주고 싶다.


사치라고 생각했던 꽃 선물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지
깨닫는 순간,



가끔은

이 낭만적이고 거룩한 낭비를
종종 해야겠다.


결심하게 되는 것처럼.



좋은 어른이고 싶다.


누군가에게.

아마 그러라고


세상이 내게

우울과 다정을 알려준 게 아닐까.


내게도 있었으면 했던

'좋은 어른'으로 자라,


'좋은 어른'을 간절히 바라는 아이에게
미약하나마 그 역할을 해 주라고.


다정을 

알려 주라고.



요즘은  그게 사람과 예술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기계가 고도화되면서,
사람과 예술이 무력하고 무능한 듯이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건,

결국 사람과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


언제고 다가가
잠시 기대어도 쓰러지지 않는
나만의 벽, 나만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일.


나는 그런 예술을 하는,


마음을 아끼지 않고,
하염없이 다정한,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나는 사랑받고 자랐고,
다정함을 배웠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지 않을까.

글로, 말로, 몸짓, 손짓으로,
받은 마음을 나누어 주는 일.
세상을 비난했던 과거를 속죄하고,
때때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마음을 덥히고, 세상의 온기를 높이는 일.


누군가의 끼니가 되었으면 좋겠다.


허한 마음도,

까끌거리는 입안도,


후후 불어 

한 술 떠서 으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그나마 괜찮아지는.


밥 같은 글을 쓰고,
든든한 끼니 같은 예술을 하고 싶다.


지금은 아득하지만,

언젠가는.


나는 그게 궁극적으로

사람과 예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므로.

최선을 다해

또 하루를 다정하고 온기 있게 살아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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