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훅 들이마시고, '흡-'하고 멈춘 틈 사이, 1달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덧 비발디의 음악이 잘 어울리고
푸릇푸릇한 새싹들을 볼 수 있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올해도 3월에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도 이제 1년이 지났지만, 아직 낯설다.
벌써 다음 주면 만으로 25살. 두 번째 스물다섯이 된다.
이번 생일은 이전의 생일과는 마음가짐이 다소 달라 놀랍다.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게 될 관심을 기대했다.
지금은 익숙한 8평 방 안에서 태생에 대해 생각한다.
태동하는 봄의 정경과 꿈틀거림, 향내음을 떠올린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 태어나고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섭리임을 복기한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태어나고 죽는다.
는 참인 명제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이 변하지 않는 진리를 되뇌었다.
크게 들이켜고 애써 삼켜 낸 더운 숨을 그제야 '파-'하고 내뱉을 수 있었다.
생사 이외에는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게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반가웠다.
나와 네가 다르고, 우리가 다르다는 진실이.
처음으로 달가웠다.
삶을 살면서, 부모님한테 종종 들었던 말이 있다.
그렇게 살면, 나중에 사회생활 못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좀 더 유연하게 살아야지.
따위의 둥글둥글하게 살라는 말.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꼭 구겨진 종이 같았다.
백지로 복구할 수 없는 이면지가 된 느낌이 들었다.
둥글지 못하다는 자괴감과 수치심에 휩싸이곤 했다.
원이 되어야 했다.
둥근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사회'라는 생활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해낼 수 있다고.
타고나길 모난 정이면서, 반발심까지 더해진 무엇의 마음으로,
세상에 부딪히며 둥글게 깎아 가려고 애썼다.
둥근 사람들을 곁에 두고 관찰하고, 둥근 마음씨를 배우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가질 수 없는 환상을 향한 갈망 같았다.
생일을 앞둔 지금, 덜컥 깨달았다.
나는 원의 세계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내가 원이었던 적도 없다.
모난 정을 다듬어 원의 세계로 편입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부드럽게 굴러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타고난 사각형이다.
나의 본질은 사각형이다.
내 삶의 모양새는 사각형이다.
고로 내가 지향하는 삶은 사각형이다.
마음속 여기저기에 뾰족하고 삐죽한 모서리를 갖고 있다.
혓바닥이 알알할 정도로 까끌하고, 목덜미가 따끔거리게 까슬 거리는 면이 있다.
언뜻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자세히 볼 수록 종이 같다.
매끄러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날카로워서 베이기도 하고, 베기도 하고,
오래도록 쓰라리고 쓰라리게 할 수 있는.
아무리 세상에 부딪혀 마모되고, 닳는다고 해도 둥글어질 수 없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면이 있다.
한 때는 부정했고,
다음엔 그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 같아 불안하고 슬펐다.
그다음엔 좌절했다.
원하는 모양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들의 둥긂과 서글서글함은 내가 가질 수 없는 모양새다.
이제는 인정한다.
조금도 욕심내지 않고.
나는 원이 될 수 없다.
나는 사각형이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나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나는, 특별한 아이는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아이다.
그렇게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모서리와 점들이 미세하게 모여 선이 되고, 도형이 된 모습이 지금의 나다.
세상에 둘이 존재할 수 없는, 독특한 나.
원하는 모양은 아니었지만, 사랑받았고 받고 있음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마음의 고향 없이 자라,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내가 생긴 모양 그대로가 고향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나는 사각형으로 살 것이다.
본래의 생김대로, 살고 싶은 생김대로.
순탄하게 굴러가거나, 부드럽진 않지만, 좋고 싫음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목표 또는 불쾌한 꼭짓점이 어디인지 선명하게 내비칠 수 있다.
보다 예리한 시선을 가지고, 기민하게 감각하고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틈틈이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다.
시선과 감각, 표현, 신념, 철학을 더 뾰족하고 날카롭고 예민하고 예리하게 가꾸면서 네모로 살고 싶다.
더 고유해지기를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는 단단한 모서리를 가진 사각형으로 살고 싶다.
더 이상 나를 깎아 내, 동그라미를 흉내 내지 않겠다는 굳은 선언이다.
대신에 창이 되려고 한다.
네모난 창.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둥글어지지 않고, 고유하게 살아갈 수 있는 창이 되길 꿈꾼다.
그리고 그런 창을 많이 만들어 가고 싶다.
내 앞에서는 온전하게 자신이 여태까지 살아온 모양새와 담음새, 앞으로 살아가고픈 삶의 형태를 그대로 꺼내 내가 가진 창에 비춰 보일 수 있도록 투명하게 살고 싶다.
그만큼의 깊은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관계인 사람들이 잠시 기대에 쉬고 갈 수 있는 단단한 벽을 가진 사각형이 되고 싶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이 질문은 마치 '벽' 같았다.
주기적으로 날 가로막으며 괴롭혔다.
답답하고 암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각지고 모남을 인정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살아가겠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 사이에서 죄책감을 갖지 않을 거라고.
나는 추악함도 올곧은 선함도 모두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의식하면서 살 거라고.
당신은 어떤 모양새와 담음새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조금은 더 영혼의 파동을 느끼는 쪽의 모양으로 삶을 이끌어 가기를 응원한다.
나로 존재할 때에도, 나와 너로 존재할 때에도, 우리로 존재할 때에도 모두 만족스러운 형태로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