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 듣지 못하는 노래를 듣는다.
BGM : Reincarnation - Rokudenashi
* 지극히 사적인 책 취향에 따라 선정한 책 추천 글입니다.
첫인상은 별로였는데,
어라? 왜 좋지...?
내가 너무 선입견을 가졌나..?
싶은 사람이 있죠.
볼수록 스며들게 되는 스타일이요.
책도 그런 것 같아요.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읽어 보았는데, 공연예술이라는 낯선 세계인 데다가, 논문같이 딱딱한 문체라서 어렵게 느껴졌었어요.
하지만 읽고 나서 이상하게 계속 문장들과 작가의 시선이 일상의 많은 순간에 다시 곱씹어 보게 되더라고요. 데미안처럼요.
되뇔수록 제가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세계와 감정, 사람들이 품으로 들어왔습니다.
때마침 북극 서점에서 작가님을 만나 뵙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겨 북토크에 다녀왔어요.
책 속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작가님을 차가운 도시 여자, 세련되고 우아한 이미지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예상외로 아담하고 라넌큘러스같이 온화하고 동글, 몽글한 이미지를 가진, 정답고 귀여운 다람쥐가 연상되는 분이셨어요.
실제로 독자와 마주했을 때, 상상했던 거랑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는 평을 종종 듣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유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 돌아봐도, 유효한 문장을 쓰고 싶어서, 최대한 문장을 감정을 절제한 채로, 건조하게 쓰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익숙한 작품인데도, 작가님의 해설과 낭독을 통해 흘러나와 귀와 마음에 닿았을 때, 전혀 다른 파동을 느꼈어요.
북토크의 전체적인 주제는 '낯설게 하기'였어요.
'낯설게 하기', 제가 처음으로 대학에서 세계 문학 발표를 할 때 맡아서 자료조사를 하고 PPT를 만들고 프레젠테이션 했던 파트였어요. 그래서 더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사실 대학교 때 배울 땐, 별로 중요하단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막상 사회에 나오고 나서 이 기법에 대해서 듣는 일이 많아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산책'을 산책이라고 부르며, 산책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C 초에 프랑스 학자들이 '산책자'라는 개념을 발표하면서부터라고 해요.
이전에도 산책을 하지 않은 건 아닌데, 지금처럼 '산책을 한다'는 개념은 이전까지는 없었다고 해요.
러시아 형식주의 학자들은 산책을 할 때는 주변을 많이 두리번거리게 되는데, 살다 보면 더 이상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의식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자동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술의 역할은 자동화된 인식을 '낯설게 만드는' 데에 있다고요.
낯설어지면 아름다워지고, 그것이 그것 자체로 올 때, 낯설어진다고요.
두리번거리지 않게 된 것들에 대해 다시 두리번거리면서, 익숙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보려고 하고, 그렇게 보이게끔 만들고, 외부의 무언가로부터 경탄당하는 능력을 기르게끔 돕는 것이 예술의 가치이고 역할이라고 본 것이죠.
사람은 자동화의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프레임을 갖고 세상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틀을 깨도록 돕는 게 예술의 역할이자 가치라고요.
그 얘기를 해 주시곤, 신작인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작가님은 이 책을 쓰기 전에 2명의 친구를 잃으셨대요.
평상시에도 사라지는 것에 관심이 많고, 죽음을 어떻게 대하고, 언젠가 죽을 거라면 지금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친구를 잃으면서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왜 기록하는가, 왜 기록해야 하는가, 나는 왜 글을 쓰는가'를 성찰해 보게 됐대요.
이 과정을 통해, '사라진 것의 목격자 (증인)이 있어서 사라진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존재했음이 남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요.
작가님이 죽더라도 기록 그 자체가 작가님이 존재했다는 사실의 목격자가 되어 줄 거고,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작가님이 존재했음을 기억하고 증인이 되어 후세에도 자신이 존재했다는 걸 증언해 줄 거라고 믿기 때문에 기록한다고 하셨어요.
2명의 친구 중에 1명은 급성 백혈병으로 죽었고, 죽기 직전까지 교류하면서 지냈다는 사연을 듣고, 한 독자님이 또 질문을 했어요.
타인의 아픔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거나, 타인의 슬픔에 충분히 공감해 주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작가님은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시냐고.
목정원 저서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47쪽에 이런 문장이 있어서 저도 궁금하던 차였죠.
어엿한 동시대인이 되기에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은 전부 타인의 아픔에 관한 일이다.
작가님은 그걸 인정하고, 그 사람의 주변에서 두리번거린다고 하셨어요.
내가 알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니까, 내가 본래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 헤아릴 수 있도록, 그 사람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고요.
작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쩌면 꿈과 행복을 좇는 것보다
나의 아픔과 슬픔을 목도하고, 모른 체하지 않고 충분히 애도하고,
가까운 타인부터 먼 타인까지 점차 시야를 넓혀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두리번거리면서 낯설게 보려는 노력을 더 우선할 때,
덜 슬프고 덜 아린 삶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삶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미래를 꿈꾸고, 현재를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요.
'후회'는 한 일보다 하지 못한 일 때문에 더 많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해요.
과거를 반추하면서, 아쉽지만 후회하진 않는다고,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고 확신하면서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었을까요.
이제껏 했던 실수를 만회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그걸 생각하며, 두려워하기보다,
이전에 했던 실수와 내게 남겨진 많은 감정적, 경험적 유산들을 되짚어 보며,
현재와 과거를 부지런히 이어
현재의 나와 주변의 타인, 넓게는 그 밖의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여유를 기르고 싶습니다.
지금의 제겐 그게 중요해요. 그다음에는 분명 또 변하겠죠.
당신은 지금 죽는다면,
무엇이 가장 후회될 것 같나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고 싶나요?
만약 자서전의 첫 줄을 적는다면,
뭐라고 적고 싶나요?
목정원 저서『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4쪽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이란에서는 춤추는 일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선 그렇지 않은데, 당신들은 왜 춤을 추지 않습니까 (...)
우리는 누군가 듣지 못하는 노래를 듣고, 누군가 보지 못하는 춤을 본다.
최근에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는 작품을 보기 시작했는데요.
청각장애가 있어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진우와 배우지만 배우로서 잘 풀리지 않는 모은의 멜로를 그린 드라마예요.
보고 있으면 제가 정말 좋아했던 <사일런트>도 떠올라요. 사일런트는 남자주인공이 후천적으로 청각장애를 갖게 되어서 여자 주인공과 이별하고 다시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인데, 연출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거든요.
이 문장을 읽으면서, '풀벌레는 목숨을 걸면서 사랑을 하는데, 인간인 나는 왜 사랑에 이유를 댈까, 나는 무언가를 할 때마다 내가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을 앞서 생각하며 핑계를 댈까' 싶더라고요.
그냥 하면 되는데요.
'잘' 할 수는 없더라도, 할 수는 있는 일이 그렇게 많은데, 왜 움츠러들었을까 싶었어요.
우리는 누군가 보지 못하는 춤을 보고, 누군가 듣지 못하는 노래를 듣고, 누군가 말하지 못하는 말을 건넬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면서 살고 싶어요.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