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까요?

매사에 목적지가 필요한 건 아니다.

by 그리운

이전 글이자 브런치스토리에 처음으로 발행한 글의 말미에 나는 다음 글이 될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흘리고는 글을 마무리지었었다. ‘나 자신으로서 글을 쓰는 행위'의 최종 목적이 되는 가장 굵직한 주제에 대해서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쓰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이어서 다음 글을 써내려갈 작정이었다.


평소 습관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나는 설계를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며 다음 글의 주제가 떠올랐으니 곧 이어서 바로 써서 흐름을 완성해야지’.


그리고 그 설계는 늘 나의 무의식 속에서는 ‘이행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었다. ‘되어(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 나라는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 연유는 다음에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고, 어쨌든 그 계획에 관해서는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굵직한 주제에 맞게 이어서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성 들여 지지고 볶아서 스스로도 기어이 떳떳할 수 있게, 쉽게 말해 ‘기를 모아’ 쓴 글들은 사실 코스요리의 정수와도 같아서 앞과 뒤의 찬조贊助가 없이는 아무래도 가치가 좀 덜하다는 것.

목적이 미식美食과 음미吟味에 있다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부유하더라도 나는 결코 코스요리의 핵심이 되는 요리만을 따로 골라서 하나씩 주문하지 않을 사람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 배의 조타수는 나 자신이므로, 배가 침몰하지 않는 선에서 어디든 좀 자유로이 다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나침반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는 평생 그 어디에도 진정으로 가 닿지 못하고 아주 조금만 더 부지런했다면…….’ 깨닫는 순간에 삶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 역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나 자신과, 또,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스스로 대역죄인이 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스스로 괴롭히는 것 또한 오래전에 그만두기로 했다. 물론 약속, 또 신뢰라는 것은 지켜서 쌓을 수 있을 때 가장 좋고 빛나는 것임엔 틀림없지만, 괜찮다. 나는 거기에서 조금 모자라고 칙칙해 보이더라도 그냥 지금의 나로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 『나로 있음』에 최선을 다하고 싶을 따름이다. 재단하는 것은 모든 각자에게 달려 있는 일이므로,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나를 그렇게 재고 자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말하는 『나로 있음』에 대해서는, 우리의 아름다운 미셸Michel de Montaigne, 몽테뉴의 것보다 적확的確한 표현을 나는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으므로 그의 표현을 조금 빌려 풀어내며 이번 글을 마친다.


(……) 그러므로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이 순간 어느 지점까지 이르렀는지를 알려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다루는 재료가 아니라 내가 거기에 부여하는 형태에 주목하기 바란다. (미셸 드 몽테뉴, 「에세 2」, 심민화 옮김, 민음사, 2022, p.131)


몽테뉴는 자신의 「지식」이 이르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이 거기에 형태 부여한다고 말했다.

이제 나의 표현을 쓴다. 나는 하나의 렌즈다. 이 세상에는 적어도, 존재하는 인구 수만큼의 렌즈가 있다. 몽테뉴는 보다 주체적 위치에서, 나는 매개적 수단으로서 스스로의 관찰 행위를 표현했다.


지금, 여기에서 ‘나로 있음’은 이 렌즈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여기서 몽테뉴가 말하고자 한 「지식」은, 피상적 의미로서 딱딱하게 두루 쓰이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책 없는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그가 그의 체로 걸러 보송하게 잘 말려 둔 하나의 체계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식(知識)」 : 『철학』 인식에 의하여 얻어진 성과. 사물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적ㆍ경험적 인식을 말하며,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단의 체계를 이른다.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지식「006」>


나는 미셸이나 미셸의 저술 행위가 하나의 예술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가 관찰하여 구축한 그 자신만의 체계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은 요구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관찰과 그 기록 행위는 객관적 타당성을 물을 수 없는 어떤 하나의 새로운 범주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정의에서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만큼은 우리가 가져다 쓸 수 없을 것이다.



'이어가다'라는 표현이 보다 자연스럽겠지만 어쩐지 나는 처음에 완성이라는 말을 썼다. 고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둔다.




때로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서 참고하는 단어의 출처를 표기할 때, 해당 페이지의 URL과 참조한 날짜를 적는 것을 생략하고 있다. 참조한 내용의 출처를 표기하는 올바른 방법이 사회적으로 이미 약조된 바 있으나, 작성하고 또 읽는 글쓴이의 알량한 편의를 위해 해당 항목의 표기를 생략한다. 구구절절 길고 낯선, 띄어쓰기조차 허용하지 않는 URL은 가뜩이나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나의 글을 더욱 정신 사납게 만들 것이고, 참조한 날짜는 내 글 속에서는 크게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2024년 1월 29일 처음 작성〕




안다.

내가 어겼다는 것.


이전에 발행한 첫 글에서 지키고자 했던 스스로의 다짐에 부합하는 것에.

나는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을 즐긴다고 썼다. 그리고 그러한 글을 써내려가고자 한다고도 썼다.


내가 그러한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나는 그러한 약조들에 아주 약간의 산들바람이라도 막히는 것은 또 원치 않는다.

해서 부끄러워지는 것이 나 자신이고, 그러한 부끄러움쯤 얼마든 견딜 수 있는 지금 같은 때에, 이처럼 스스로를 번복하는 과정에서 보다 수월하게 바람이 불어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이러한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이 과정이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 있다면 그만큼 애석한 일은 또 없을 것이지만,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창조의 이름 앞에서는 어디에도 묶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웬만큼은 이러한 자세를 나는 유지하려 할 것이다.


<커버 이미지 출처: Aiden Jarrett,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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