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라 불리는 그 공간의 연식은 내 나이를 넘어 나와 나이차이가 10살 남짓한 누나들 보다도 훨씬 많다. 부모님이 부부의 연을 맺기는 커녕 서로를 몰랐던 시절부터 친가는 우리라는 이름 아래 그곳에서 지내 왔었다.
예전 집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 집은 특히나 집을 구성하는 여럿 공간적 명칭으로 불릴 수 없는 어설픈 공간들로 이루어진 장소였다.
대문에서부터 이어지는 기다란 기억자 모양을 한 애매한 공간을 두고 셋방이 여럿 있었는데 어설픈 그 공간의 너비는 5살 정도에 내가 풀쩍 뛰어다녀도 거뜬할 정도였다. 우리는 그곳을 '마당'이라고 칭했다.
'마당'이라 불리는 공간에서 나는 종종 유아용 세발자전거를 타곤 했는데 대문에서 반대편 끝자락에 있는 부엌스럽지 않은 '부엌'에 도착할 때면 그 조그마한 자전거조차 한 바퀴 돌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안장에서 벌떡 일어나 제 몸만 한 자전거를 힘겹게 통째로 돌려야만 다시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욕실'이란 곳은 씻을 때면 항상 저기 뒤 보일러가 우우웅 소리를 내며 날 지켜봤고 거무튀튀한 시멘트 바닥에 불어오는 맞바람을 막아보자 합판 비슷한 것을 욕실 입구에 덧대었을 뿐이다. 빨간 고무대야에 뜨거운 물을 부어 놓고 그곳에서 나는 목욕을 당했다. 주말, 엄마가 날 부르는 시간은 괘씸할 만큼 정확했다. 항상 개그콘서트 심현섭 씨가 환호를 받으며 빰바야를 우렁차게 외칠 때 쯤이었는데 그 부름을 애써 무시했지만 이내 또박또박 내 이름 석자를 부르는 한층 날카로워진 소리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욕실이라 불렸던 장소는 부모님의 방 (우리는 그곳을 '큰 방'이라 칭했다)과 우악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시멘트덩어리 사이에 어찌 뚫었는지 모르지만 투박한 간이 문이 달려 있었고 항상 제대로 닫히지 않고 덜렁거렸다.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 속 나는 '큰 방'에 머물러 있었고 꽤나 오랜 시간 동물 모형을 가지고 놀았다. 그중 코끼리 모형은 내가 가장 애정하는 동물 모형이었다. 주름진 살결이 오돌토돌 잘 표현되어 있었으며 크기도 원래 동물을 본 딴 만큼 커다란 녀석이었다. 동물 역할놀이 모형 중 단연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놈이었고 내 사랑을 독차지했다.
아이의 무차별적 애정을 듬뿍 받아내기 힘겨웠는지 역할 놀이에 완장을 찬 녀석치고 코끼리는 다리가 훌러덩 종종 빠져 완장 값을 하지 못했다. 이음새 부분들을 잘 끼워 살살 돌리면 금방 고쳐질 녀석이었지만 네다섯 살 아이의 작디작고 미숙한 손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한 손에는 다리 빠진 코끼리 다른 한 손에는 빠진 다리를 꼭 부여잡은 채 부모님 방 저기 낮은 턱 너머 '욕실'에서 아버지의 시커먼 작업복의 떼를 벗긴다며 상체가 들썩여 머리가 보였다 말았다 하는 엄마를 조심스럽게 부르는 날이면 그녀는 언제든지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와주어 코끼리 다리를 고쳐주었다. 그리고는 엄마 품에 안겨 고쳐진 다리를 보며 흡족해했다. 그 기억이 대체 뭐길래 코끼리의 완장이 벗겨지고도 오랫동안 나에게 엄마는 코끼리 다리를 뚝닥 고쳐주었던 사람이었다. 마당으로 나가면 쓰러질듯한 기와지붕들을 받칠 나무 기둥이 엉성히 서있었는데 그 바로 옆 돌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면 어른 둘 정도가 누울 수 있는 대문 위 공간이 있었다. 우린 그곳을 '옥상'이라 불렀다. 그곳엔 나만한 대추나무가 있었는데 대추가 무르익을 때쯤이면 나는 할머니와 옥상에 올라가 대자리에 누운 채 지금 밤하늘 보다 많은 별들을 보며 대추 하나씩 똑 떼먹곤 했다.
나의 유년시절의 본가는 단지 시멘트 덩어리 위에 욕실, 침실, 주방이라는 직책 정도만 간신히 부여받은 어설픔 투성이 공간이었다.
그리곤 내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 즈음 이사는 여의치 않았는지 나름 목돈을 들여 리모델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