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범에게
노인들만 남은 이곳은 이제 친구라 부를 사람도 없다.
다 갔다. 쌀집 아지매도, 채소 할매도 홍합할매도 다 갔다.
남은 건 고작해야 금이 수퍼 3층 아지매뿐이다.
아지매 집에 가서 시간이란 지겨운 녀석을 대충 때우고는 터벅터벅 '내 집'으로 걸어온다.
내 집이라니 실소가 나온다. 여든을 훌쩍 넘기고는 이제야 독립을 했다. 동네 마실 나갈 때면 걸음이 날래다며 소문났던 나도 이제 다 했나 보다. 십 분이면 갈 거리가 왜 이리 고되고 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빌어먹을 마스크 덕에 숨소리는 더 되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내 집'에 도착했다.
평생을 세상과 함께 했지만 참 쉽지 않은 세상이다. 열쇠 구멍은 없고 손으로 번호를 꾹꾹 눌러대야 된다.
망할 것. 계단 하나하나 겨우 올라 2층으로 간다. 나는 이제 205호 할머니다.
더 이상 감나무집 할매가 아니다.
집 문을 열면 수도세를 아끼겠다고 틀어놓은 수돗물 한 방울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서느렇다. 그래 그래도 내 집이다. 아무도 없는 내 집이다.
웃옷은 대충 옷걸이에 걸어두고 그 걸어온 거리가 뭣이라고 방 한쪽 구석에서 숨을 가다듬어야만 한다.
이렇게 멍하니 있다 보면 금세 저기 어디서 나왔다며 나왔다며 자랑하듯이 문 부서질 듯 대문을 닫고 거무티티하게 기름칠로 세수를 한 아범이 엄마 밥 드셨나 퉁명스럽게 날 불러댈 것 같다.
삶이란 게 그런가 보다. 내 홀로 영감 옆에 와 네 명의 자식들과 살았다. 큰 놈 따라 도시로 온 가족이 같이와 복작복작 살더니 다들 시집 장가 가버리고 이젠 또 손주 녀석들은 하나 둘 자기 살 길 찾아 떠나버렸다.
집엔 노인네들만 남더라.
고로난지 코로난지 별 이상한 병이 돌더니 아범이 하는 일이 부쩍 힘들어졌다.
사업이란 게 원래도 힘든 건 알았지만 늙은이가 느껴질 만큼 이번에는 절벽 끝까지 내몰렸나 보다.
며느리가 몇 번이고 내게 조아리고 조아려 있는 돈 없냐 하는 걸 보면 말이다.
2천 원 그래 2천 원 남기고 다 내주었다.
그뿐이랴 40년은 훌쩍 넘게 우리라는 이름 아래 살았던 그곳을, 네가 그렇게 놓지 않으려 했던
그곳을 기어코 내놓아버렸다.
집은 팔렸고, 이사는 가야 하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래, 내가 따로 살자고 했다.
아범은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며느리랑 같이 사니 친구나 동생이 놀러 오면 눈칫밥이란 걸 나도 먹었는데 그래도 이젠 동생들도 자주 오고 오빠도 종종 와서 이것저것 가져다 준다.
아이고 밥이라도 먹자. 끼니를 때워보자. 그래 먹자 먹어.
어제 해놓은 멀건 북엇국을 다시 데워야겠다.
펄펄 펄펄 끓는 북엇국 세 숟갈도 안되어 보이는 북엇국 한참을 먹는다.
나이가 드니 물도 왜 이리 안 먹히는지 모르겠다
밥만큼 약을 먹어야 하는데 물이 안 넘어간다.
매일 그놈이 그놈인 티브이를 틀어놓고 코로나 저것이 언제쯤 우리 아범 덜 힘들게 할까 보고 있지만
도통 사그라들 생각이 없다.
아범 걱정으로 이런저런 잡념에 휩싸이다보면 꼴까닥 잠에 넘어간다.
나는 그날이 아직도 훤하다.
숨 막히는 가난. 아무것도 없는 부모 밑에 중학교는 고사하고 국민학교 졸업도 못 시킨 채 넷 중 제일 먼저 나왔단 이유 하나만으로 너를 내 품에 품지 아니하고 머나먼 곳으로 떠나보냈다. 돈 벌어 오라는 네 애비 말에 뒤를 흘끗흘끗 돌아보는 너의 까까 먹은 뒷머리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애비 욕할게 무엇 있냐 네가 가는 걸 끝내 말리지 못한 나도 똑같은 사람이다.
그래 그 세월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우콩만 한 촌 놈을 아직 고간에 털도 안 난 너를 누가 써줄까, 얼마나 고생했을까 끼니는 옳게 먹었을까 이따금 그런 얘길 하며 울부짖는 너를 보면 내가 천하의 몹쓸 년이 돼버린다.
언제고 너를 봤더니 그 까까머리 꼬맹이 뒤통수가 훤히 보이더니 어느새 미간이며 눈가며 주름이 나보다 깊게 파여 있더구나. 너나 나나 같은 긴 세월을 보냈지만 너의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훤하다.
어매가 많이 원망스럽지.
나도 내가 원망스럽단다. 아범아 왜 너에게만 짐을 안겨 주었을까 그래도 딴에는 피해 주지 않으려 양말공장을 꽤나 오래 다녔지 않느냐 풍이 와서 비록 일흔이 되기 전에 그만둬버리긴 했다만 난 그 풍 조차도 원망스럽단다. 그게 오지 않아서 돈이라도 조금 더 알뜰히 모았더라면 너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다 네가 젊은 시절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시골에 괜찮은 집 마련해준다 했을 때 그때 나갔으면 이렇게까지 짐이 안되었을 텐데 내 이기심이 너를 더 힘들게 했다. 내가 미련퉁이다 내가 미련퉁이야.
그래도 이만한 방이 어디더냐 골방에 박아두지 않고 나름 널찍한 집에서 나는 잘 지낸다.
염치가 없어 어찌 지내는지 묻지도 못하겠다. 내 새끼 가여운 내 새끼.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아직 제대로 너에게서 달아나지 못한 손주 녀석들의 안위보다 여전히 식구를 가득 짊어진 채 무겁게도 걸어가고 있는 네가 눈에 밟힌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
기력이 쇠해졌는지 누구보다 재빠르다고 따라가기 힘들다 하던 발걸음은 이제 느림보가 되어버렸지만
손주 놈들이 저녁이면 바쁘게 전화 오고 손자 녀석은 그래도 지 할미라고 이따금 너희들 보러 오는 날에 노인 냄새 가득한 이곳에서 꼭 하룻밤을 자고 가지 않더냐.
나는 그래도 남매가 다 건강하니 살아있지 않느냐.
아침이면 무거운 발걸음으로 쿵 닫히는 대문 소리를 내는 너 뒤를 조심히 따라나가 장독대에 물그릇에 두고 빌고 빌었단다. 우리 아들 오늘 다치지 않게 건강하게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이제 대문 부숴질듯 한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여전히 난 너를 그리워하고 걱정한단다.
내 아무쪼록 잘 챙겨 먹고 운동하고 내 용을 써서 건강할 테니 너에게 피해 안 끼치마.
내일 어버이날이라고 찾아온다는데 내 손안에 가진 건 없어도 네가 좋아하는 매콤한 고추 지짐이라도 한 넙띠기 준비해야겠다.
나는 다 이해한다.
건강해라.
아무쪼록 건강해라.
아범아 아니 아들아 미안하다
어매가 미안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