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생각을 찾습니다.

[정인의 크루 에세이 11] 일주일의 유급 휴가가 생긴다면?

by 정인



반 강제로 시작된 휴가


내일이면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일주일의 유급 휴가가 끝나는 날이다. 아직도 핸드폰 메신저 창을 보면서 내일 하루 더 연차를 써야 하나 고민하지만 아마도 내일부터는 다시 일하는 일상으로 복귀할 것 같다.


주 초에 주 여니님을 통해

"일주일의 유급 휴가 기회가 생겼습니다. 뭐 하면서 쉬고 싶으신가요?"

라는 크루 에세이 질문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이번 한 주를 통째로 쉬게 될 줄 몰랐다.


계획 없던 휴가의 발단은 이랬다.


지난 주말부터 몸상태가 영 안 좋더라니, 월요일 아침 '도저히 안 되겠다'라는 생각에 반차를 내고 병원에 다녀와서 다시 연차를 냈다. 그리고 화요일에 잠시 출근했다가 좀비 같은 모습에 회사로부터 휴가를 권유받았다. 중요한 미팅과 닥쳐있는 일정들이 불안해 억지로 몸을 끌며 했던 출근이기에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것들만 마무리하고 늦은 오전 사무실에서 나와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수요일까지도 골골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회사에서는 한주 푹 쉬는 걸 권유했었다. 하지만 몸이 좀 나아져서 목요일부터 출근하겠다는 답변과 다짐(그리고 소중한 연차를 지키겠다는 다짐)도 잠시, 복통과 몸살에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나서야 목요일 아침에 한 주를 온전히 쉬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예상치 못한 휴가가 시작되었다.





이번 휴가에 이런 여유는 없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급한 업무들, 소중한 연차, 휴가 계획과 맞바꾼 나의 휴가(병가)는 생각보다 너무 아무것도 없이 지나가버렸다.'병원-집-침대-잠'을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 간간히 정신이 차려질 때면 동생과 대화를 하거나 열댓 개씩 쌓여있는 메일을 보면서 다음 주를 걱정하는 것. 그리고 계속 이렇게 일해도 괜찮을까? 지금 내 이 무욕의 일상은 괜찮은가? 하는 질문을 하다 다시 잠들기.


이 중 가장 많이 떠오른 생각은 "내가 지금 아무런 에너지도 없구나"

못해서 아쉬운 일도, 하고 싶은 일도 크게 없는 지금의 나는 지난 크루에시이를 쓰며 '좋아하는 것들'을 미루던 나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한 주를 돌이켜보면 마음 편히 쉬었다기보다는

몸은 편하게 마음은 더 불편하게 보낸 한 주였구나 싶다.

(유튜브로 퇴사 브이로그나 의욕을 얻는 방법 영상을 한 서른 개쯤 본건 비밀 아닌 비밀이다.)



좋아하는 일들은 미루면 사라져요,


한 주간 모아둔 생산적인 생각 에너지를 끌어모아

만약 내가 휴가가 생긴다면. 마음까지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서 해 보고 싶은 일들을 메모장에 적어보았다.


휴가에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차이


이 와중에 처음에는 질문을 다르게 이해하고서는

(사실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휴가 동안 하고 싶은 일을 적어버린 나는 다시 '쉼'에 초점을 맞춰 휴가 동안 하며 '쉬고' 싶은 일을 적어보았다.


예전이라면 여행 가기, 좋아하는 카페 찾아가기, 친구를 만나거나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들을 꼽았을 텐데

서너 톤은 차분해진 메모장을 보며 지금이 단순히 몸이 아파서 의욕이 떨어진 시기가 아닌 '삶의 권태기' 같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권태기인가 봐요,


내가 요즘 겪는 권태기의 특징은 '생각하기'를 피하는 것이다.

해야 할 일에 적어둔 '핸드폰 없이 불안하지 않기' 같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보고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쓰지 않으면 내게 닥친 문제들을 바로 마주할 수 없어서. 계속 단편적인 생각이나 잠으로 도피를 하는 것 같다.


이번 병가 기간 동안에도 누워서 큰 감흥 없는 영화를 여섯 편이나 흘려보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긴 휴가가 생긴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들은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하는 것들이었다. 혼자 수영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면서 지금 도망가고 있는 생각들에게 다가가는 것.


추측컨데, 생각을 하고 싶지만 모른 채 하는 이유는 우선 그 생각이 너무 무거워서

그리고 생각에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던 지금으로 돌아올 수 없을까 봐. 지금 멈춰야 하는 이유, 내가 그만해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될까 봐 일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7개월간의 인턴을 마친 소중한 우리 팀 인턴 레이첼이 마지막으로 긴 인사를 남기며 이런 말을 했다.

매니저님을 통해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태도와 마인드셋을 배웠다고, 그리고 제가 감히 매니저님의 마음건강을 걱정한다고. (감히라니 레이첼..:( )


미숙하나마 누구에게 가르쳐주고 나 자신은 잊어버린 태도와 마인드셋, 그리고 그 모든 걸 아우르던 에너지.

에너지와 하고 싶은 일이 가득하던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흐린 날의 바다와 같이 넘실거리는 일상을 보낸다는 것이, 그리고 분명 올 것을 알고 있는 태풍에 흠칫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것이 참 낯선 요즘이다.


그래도 언젠가에는 그 낯섦에 도망가버린 생각들을 붙잡아서 내 곁에 앉히고 차분히 대화를 좀 해 봐야지. 미루다가 사라져 버린 수많은 좋아하는 일들처럼. 사유하고 생각하는 것에 너무 둔해지기 전해, 내가 그걸 즐겼다는 것조차 잊기 전에 조금씩 생각을 마주해봐야겠다.



P.S.

안녕하세요, 하반기에 다가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는 크루 정인입니다.

모든 직장인의 1순위 고민이 퇴사라던데,

저는 요즘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는게 아닌 일 자체를 모두 그만두는 퇴사라는 게 필요한가? 라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크루 에세이를 통해 새로운 방향을 이야기 할 수 있길 혹은 안정된 마음가짐을 말할 수 있길 바라며 일을 준비하는, 일을 해내는 그리고 저처럼 일을 고민하는 모든 분들의 하루를 응원합니다!





본 에세이는 청춘들의 오아시스 '비저너리' 브런치 채널에 2018년부터 연재된 크루에세이의 일부입니다.


2020년, 하반기에 들어서던 시기 적었던 첫 병가의 기록이네요.

이후로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지 못해 맞이한 두어번의 휴가(병가)를 더 겪고,

몇 년간을 더 일하다 이제는 회사를 나와 조금은 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회 초년생이던 저 시절의 제게는 일하는 마음만큼 일과 삶을 함께 지키는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아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어려운 주제이지만요.


여전히 어려운 고민을 미루고 쨟게 집중할 수 있는 것에 몰두하는 습관은 고쳐내질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제 몇 살은 더 노련해졌으니 먹기 싫은 야채를 종종 다져 볶음밥에 넣어주시던 엄마처럼, 하기 싫어 미루던 생각들을 좋아하는 것들 안에 숨겨 나도 모르게 해내며 자신을 달래 보아야겠어요.


2024년의 시작이자, 여느때와 다름 없는 하루입니다.

하지만 새해만큼 미뤄 오던 것을 용기있게 시작할 핑계도 없지요.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도 글을 쓴 저도

'못할거야' '좀 있다가' 로 회피하고 있던 것들 하나는 시작해보자고 이 글 말미에 약속을 하나 심어두고 가보면 어떨까요. 이 글을 아주 나중에 다시 보며 그래도 시작은 했네! 라고 말해보고 싶네요 :)


모두 걱정은 있어도 그래도 행복해서 푹 잠드는 일이 많은 한 해가 되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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