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기억일까. 어릴 때는 언제나 ‘놀림’으로 친구들과의 대화를 지속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속상한 마음을 부모님께 말씀 드리면 “신경 쓰지마”라는 잔잔한 대답이 돌아오던 그 어릴 적 기억이. 어쩌면 친구들의 놀림보다 그 잔잔한 대답이 더 서럽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신경이 써지지 않으랴, 싶었는데 어느새 인간관계에 부정적인 감정을 그렇게 많이 들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더랬다. <리틀 포레스트> 속 혜원도 그랬을까.
<리틀 포레스트>는 유난히 무관심에 대한 언급을 다루는 장면들이 있다. 어쩌면 그리움, 아니 어쩌면 무언가에 대한 곧은 신뢰일 수도. 극 중 혜원은 은숙의 고민상담에 그럼 일을 그만 두라며, 무관심해 보이는 말을 건넨다. 혜원 입장에서는 위로였을 지 몰라도 은숙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요즘 유머로 혜원은 T이고, 은숙은 F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MBTI가 그렇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듯 보이는 그들에게는 싸움이 되었다.
“아니, 그만두고 말 거면 왜 고민을 하겠냐, 너는 그만두는 게 그렇게 쉽냐?”
세상에 있는 모든 고민상담들을 관통하는 듯한 현명한 은숙의 말에 감탄할 수 있는 것도 잠시, 우리의 주인공 혜원은 상념에 빠진다.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어릴 적의 그녀와 그녀의 엄마. 자신이 왕따인 것 같다고 말하는 어린 혜원에게 그녀의 엄마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딸의 고통에 아무런 공감도 없이 툭 나온 듯한 말에 어린 혜원은 울음을 터뜨린다. ‘왕따인 것 같다’는 말을 엄마한테 뱉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민이 있었을지 보이는 듯한 서러운 눈물에도 그녀의 엄마는 일말의 당황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눈물을 다정히 닦아주며, ‘널 괴롭히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너의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어린 혜원에겐 그 말이 무슨 뜻일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겠지만, 어느새 그녀는 타인이 주는 상처에 초연해지고, 나를 애정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결국 무관심이라고 하는 그녀의 엄마를 닮았다. 어린 혜원은 그런 엄마를 잠시나마 미워했겠지만 결국은 딸의 상처를 보호하기 위한 애정이었다는 것을 혜원은 그 상념 속에 깨달았을까.
왕따에 눈물 흘리던 초등학생 혜원이 어느덧 자라 교복을 입고 나무 그늘 밑에서 그녀의 엄마와 함께 토마토를 먹는 장면은 관객들까지 무더위 속 선선한 바람을 느끼게 하는 듯하다. 그들의 대화 또한 그렇다. 무더위 같이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한 대화 속의 한 줄기 선선한 바람 같은 대화를 그녀들은 나눈다. 아빠가 보고 싶냐는 혜원의 질문에 말없이 토마토만 먹던 엄마는 느닷없이 다 먹은 토마토 꼭지를 밭으로 던져버린다. 그러고는 ‘토마토는 저렇게 던져놓아도 자라더라’며 딴소리를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했을 어린 혜원은 또 다시 성장하여 그 뜻을 알게 된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던져 놓아도 다시 싹을 틔울 수 있으려면 노지에서 햇볕을 듬뿍 받고, 완숙이 된 상태에서 딴 토마토여야 한다. 보고 싶다는 뜻이었어.”
시골에서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듯 보였던 그녀의 엄마는 어쩌면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딸을 위해서 선택한 시골 생활에 딸은 “이건 엄마가 선택한 인생이지, 내가 선택한 인생이 아니야”라고 외치며 반항하고, 쉴 틈 없는 사계절의 농사 속에서 그녀는 남편을 그리워했다. 무관심으로도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모순되게도 엄청난 애정과 정성이 필요하다. 그러한 노력을 쏟아 그 자체로 완전히 성장한 모습을 보여야만 토마토는 무관심 속에서도 스스로 자란다. 무관심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시발점에는 애정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혜원의 엄마가 자신의 남편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딸에게도 보여주는 애정의 방식이다. 19년 간 노지에서 햇볕을 듬뿍 쬐어주며, 온갖 애정으로 완숙이 된 자신의 딸 혜원을, 그녀는 놓았다. 완숙으로 잘 성장한 그녀의 딸은 무관심 속에서도 잘 해낼 것이기에. 다행히도 그녀의 농사는 성공적이었고, 혜원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언제나 알려달라고 조르던 엄마의 감자빵 레시피를 받고는 ‘이게 불만이었다’며 당차게 레시피를 수정하기도 한다. 그렇게 혜원은 어느새 자신을 틔웠다. 그녀에겐 이제 더 나은 성장만이 남았을지도.
혜원의 친구 재하 또한 그렇다. 일년을 꼬박 공을 들인 사과 농장이 밤새 몰아친 비로 전부 망해버렸을 때 그는 아무런 속상한 감정도 내보이지 않았다. 좌절하거나 우울해할 줄 알았던 관객들의 예상을 기만하기라도 하듯 그는 썩어버린 사과에 무관심하다. 오히려 ‘잼 만들게 좀 주워놓으라’며 아무 일도 없는 듯 대응한다. 우리는 무관심한 그의 태도를 보고 재하가 ‘자신의 농장에 애정이 깊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농사는 특성 상 애정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 마저도 농사가 얼마나 깊은 애정과 정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인지는 알 수 있으리라. 또한 재하는 영화 속에서 언제나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랬기 때문에 관객은 더욱 그의 속상해 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하는 그러지 않았다. 무던한 모습으로 ‘초보 농사꾼의 수업료’로 치겠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이 말 속에서 재하가 드러낸 무관심이 애정이 없음과 동의어가 아님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무너지지 않은 신뢰를 무관심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과정이 더 성장할 자신을 위한 도약이 될 것임을 그는 의심치 않는다. 누가 그랬던가, 성장은 자신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자신의 길에 대한 강한 자신감으로부터 표출되는 그의 무관심이 부러움을 느끼게 한다.
부모님의 잔잔한 대답이 자신에 대한 무관심으로 느껴지던 어린 날을 거쳐 어느새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안다. 그때 부모님이 해주신 말씀이 어쩌면 전부 정답이었음을. 그리고 그 대답은 진심 어린 걱정과 애정 속에서 나왔음을. 무관심인 줄 알았던 애정 속에 우리는 성장했다. 지금보다 덜할 애정 속에서도 꼭지만을 가지고 스스로 튼튼하게 싹을 틔울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충분한 애정 속에서 치열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 영화 공식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