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 Francia Mar 29. 2023

오늘, 당신의 마음은

아이가 처음 학교에 간다.

소녀는 외할머니가 입학선물로 사준 노랑 책가방을 어깨에 둘러맸다. 좁은 어깨에 걸쳐진 가방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양 어깨 끈을 연결하는 버클을 달칵 채우고 길이를 최소한으로 조절하여 가방을 아이 등에 고정시켜 주었다. 아이는 집 앞에서 제 친구와 만나서는 꺄르르 웃으며 학교로 향했다. 그 뒤를 나도 따라 걸었다.


120센티미터를 간당간당 넘 소녀들의 작은 등에 책가방이 매달려간다. 햇살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아이들을 따라가며 비추었다. 작은 발을 디딘 자리마다 마치 애니메이션 효과를 적용한 듯 하트가 송송 솟아오른다. 물론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소녀들이 손을 꼭 잡고 자박자박 걷는 뒷모습이 퍽 사랑스러워서 나는 조금 울 뻔했다. 가슴 깊이 끌어안고 있던 내 작은 새가 파드득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라 비행을 시작하는 듯했다. 그 서툰 비행은 가슴 시리게 아름다웠다.


저 예쁜 아이는 이제부터 저렇게 제 길을 걸을 테지.

그리고 나는 저 아이에게 계속 뭔가를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품겠지. 내 엄마가 여전히 그러듯이.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아이를 키우지 않았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둘째 아이를 유치원 버스로 보낸 뒤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매일 아침 그곳에서 마주치는 분들과 가벼운 목례와 눈인사를 나누고 운동을 시작한다. 평소처럼 러닝머신 위에서 3킬로미터 정도 뛰고, 하체와 상체 순서로 근력운동을 했다. 런지와 스쿼트, 레그 프레스와 레그 컬, 힙 업덕션과 크런치, 랫풀다운과 체스트 프레스를 한 세트씩 끝낼 때마다 헉헉 거리며 핸드폰을 본다. 구독하는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한 편씩 읽으면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러다 보면 다음 세트 때 내 마음은 주로 방금 읽었던 글에 머문다. 마지막으로 매트 위에서 폼롤러를 굴려가며 근막 이완 스트레칭을 한 뒤, 땀에 젖은 채로 수영장으로 갔다.


샤워를 하고 깨끗해진 몸에 수영복과 수모와 수경을 걸치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헬스장에서 데워진 몸은 이미 식었으므로 수영장 물이 차다.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 물에 들어가서 자유형 한 바퀴를 돌면 금세 다시 몸이 더워진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접. 배. 평. 자. 영법으로 레인을 왕복했다. 속도를 올리기 위해 발을 더 힘차게 차다 보면 물속에서 숨이 켜켜이 차오른다. 마치 달리기를 할 때처럼, 호흡이 끓어오르다가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러다가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크게 한 호흡 들이마시면 막혔던 뭔가가 팍 하고 터져 나오면서 해방되는 듯하다. 이 괴롭고도 상쾌한 기분 또한 말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운동을 하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실존적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인 것 같다.




수영장을 나와서 도서관으로 갔다. 그림책을 읽다가 새로운 말들을 만났다.



아, 나는 지금 '스물트론스텔레'에 앉아있어, 라고 말하고 싶다.

내 옆에 있는 낯선 사람과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의 스물트론스텔레는 어디인가요.




학교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이 어여쁜 존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생각했는데, 그 답을 여기서 찾았다.


나즈 : 누군가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자부심과 자신감.


인도에서는 이런 감정을 나즈라고 하는구나.

자신이 무조건적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건 자존감이라는 삶의 기술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자신의 힘으로 견디고, 일으키고, 일구어나갈 것이다. 내 자식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부디 나즈를 느끼기를.

이 책에서 내가 유일하게 아는 단어. 휘게. 단순한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능력을 갖는다면 삶이 조금 수월해질지도 모르겠다.


걷거나 달릴 때 그 끝에서 주로 감사함을 만난다. 지난 주말에는 마라톤을 뛰었는데, 힘들어 죽을 것 같아서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몇차례 있었다. 안 해도 되는 일에 굳이 돈을 지불해 가면서 뛰어드는 건 그것이 나에게 좋은 걸 가져다준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10킬로미터를 지속적으로 뛸 수 있는 내 심장과 체력에 감사했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지원해 주는 가족에게 고마웠다. 건강한 신체를 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했다. 몸의 수고를 통해 불안과 무력함에서 멀어지며 의연함과 충만함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세상이 나를 거부하는 것 같고, 또 어떤 날의 삶은 호의적이다.

내 인생이 지리멸렬해서 도망가고 싶다가도,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그 어떤 것이 되기 위해 혹은 되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애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매일 변하는 날씨 같은 생의 모순과 삶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수용하면 될 것 같다는

굉장히 어려운 생각도 해본다.




어떤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걸 뭐라 부르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당신이 그걸 말하고 느낀다는 것일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