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 Francia Mar 07. 2023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

<법정의 얼굴들>


박주영 판사의 판결문은 평범하지 않다.

대개 판결문은 엄숙한 톤으로 누군가를 단죄하는 말이지만, 그의 글은 사건당사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의 마음 건드린다. 양형 이유에 감상적 표현을 쓰고 시구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의 글에서 사건은 서사가 된다. 글은 사건의 당사자이지만 소외되곤 하는 피해자를 보듬는다. 그의 언어는 섬세하고 사려 깊어서 큰 울림을 주며, 그 따뜻한 시선은 희망적이다.


법관들 대부분은 이런 양형 이유를 쓰지 않는다. 너무 이질적이라 불편하게 보는 판사도 많다. 나 역시 이렇게 쓰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판사들은 원래 튀는 걸 좋아하지 않고,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특히 그렇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썼던 이유는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재사고의 비정한 실태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의 비참함과 성범죄의 잔혹함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메시지가 해안 깊숙이 가닿을 만큼 높고 격정적인 파도여야 했다. 때론 '칼 같아야 할 판사가 어디서 눈물이야'라는 댓글도 있었지만 각오하고 썼다.

P. 359


전작 <어떤 양형 이유>에서 박주영 판사가 겪은 사건들과 재판 판결문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 책 <법정의 얼굴들>은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이다. 전작에 비해 톤이 다소 느슨하여 가독성도 더 좋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몸이 쇠약해져서 병가를 낸 참에 이번책의 집필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애독자로서 기쁘고 동시에 슬프다.


한 사람이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외부에서 그 이유를 전부 알 수는 없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사연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고립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는 한 듣는 사람이 있어야 마땅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극심한 고통에 대해 혼잣말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P.33


윗글은 인터넷에서 만나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건의 피고인에게 쓴 양형이유 중 일부이다. 박주영 판사가 티브이 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했을 때 들려준 사례이기도 하다.




법관이 하는 일에는 어떤 수고로움이 따를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었다. 김혜수배우가 판사 역할을 맡았던 <소년심판>이라는 작품을 봤을 때의 감정도 떠올랐다. 판단 기준이 되는 법령이 법전에 존재하지만, 양형을 하는 것은 결국 감정을 가진 사람의 일이므로 판사의 감정노동도 상당할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포털에 각종 사건 사고를 접하고, 그 일에 관한 재판 결과를 '징역 00년' 따위의 짧은 말로 읽고, 이내 잊어버린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모든 사람들 - 죄를 저지른 사람, 범죄의 대상이 된 사람, 죄인을 연행하는 사람, 재판을 준비하는 사람, 벌을 정하는 사람, 벌을 집행하는 사람- 을 보지 못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형사 재판이 이루어지는 법원과 법이 집행되는 교도소를 경험하지 않는다. 소년원이나 교화시설의 시설 및 상태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알아서 잘 관리되고 있을 거라 막연히 믿을 뿐이다. 들은 철저히 인비저블(invisible)이다.



사건이 발생하면 그 일의 주체를 단죄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배경을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일을 사회의 책임으로 떠넘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가난과 질병, 아동학대와 청소년범죄의 이면에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재판은 오직 해당 사건에만 효력을 미친다. 어떤 범죄도 미리 막을 수 없다. 형사재판이 단죄하는 건 국가나 사회가 아니다. 이미 발생한 오직 한 사건, 한 개인 뿐이다. 이 지점이 나를 항상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박주영판사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동시에 이 지점이 그가 존경받아 마땅한 직업인인 이유이다.


질병이건 사고건, 예상치 못한 인생의 돌부리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지금까지 꿈꿔온 삶의 모습을 일순 허물고 극적으로 바꾼다. 회귀할 수 없는 안온한 일상, 당신 없는 여생, 나 아닌 다른 삶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피해의 첫인상은 항상 같은 얼굴이다. 피해자는 회복 불가능한 상실을 견디는 사람들이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비극이다.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네가 없는 고통이 너무 커서 일을 그르칠까 봐, 내가 가장 강할 때만 널 그리워했다"는 극중 아버지 (매즈 미켈슨)의 말처럼, 사랑하는 이의 부재는 가장 강할 때조차 버티기 어렵다. 결국 비극의 본질은 사랑하지만 각자 다른 시간을 사는 것, 즉 시간차다. 죽음이 두려운 건 불시성 때문이지만, 죽음이 슬픈 건 시차 때문이다.
몸은 한 사람만의 것도 아니다. 물건은 대개 누군가의 전속적 소유지만, 삶은 항상 공동 소유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삶을 공유했던 누군가의 일부도 죽는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삶은 지분으로 나뉘지 않는 총유다. 연인의 죽음은 n분의 1의 상실이 아니라 전부의 소멸이다. 기형도 시인은 "사랑을 잃고 쓴다" 고 했지만, 내 경우엔 사랑이 비어버린 자리에 채울 글이 없었다. 나는 사랑을 잃고 쓴 걸 지웠다. 빠져나간 건 너였지만, 부재한 건 나였다. 너를 잃었는데, 내가 죽었다.

P. 108


무수한 사건의 피해자들. 회복 불가능한 상실을 견디는 그 들을 떠올려본다. 우리가 목도한 사건 사고의 희생자들, 그들의 유가족들, 그들을 사랑했던 남겨진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나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이 책과 같은 공감의 언어는 필요하다. 아니, 감사하다. 삶을 고요히 견디는 모든 이에게 무심한 직설보다는 따뜻한 위로와 다정한 시선, 사소한 연대가 이 되리라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월든 Walde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