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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ul 19. 2023

내 아이가 가해자라니

엄마가 된 지 8년이 지났다.

벌써 8년이나 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 고작 8년밖에 되지 않았음에 막막하기도 하다. 아마도 이 글은 후자에 관한 것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끊임없이 나를 내어주는 일이었다. 초인적인 노력을 요하는 순간을 수시로 마주. 이처럼 누군가를 위해 지없이 나를 내려놔야 하는 삶을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나에게 육아란 이제껏 겪어본 일 중 가장 복합적으로 고된 일이다.



아이들이 학령기에 접어들 돌봄에 관 육체적 노동 현저히 줄었다. 8세, 7세가 된 나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옷을 찾아 꺼내 입고, 입었던 옷을 세탁 바구니에 벗어놓을 줄도 알며, 식사시간에 밥도 스스로 떠먹는다. 식사 후 빈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제 책상과 가방 정리도 스스로 곧잘 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이 서툴러서 아직 내 손이 필요하지만, 스스로 하는 일이 늘어나고 말도 행동도 점차 분명 해지는 아이들이 대견하기만 하다. 특히 첫째는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정신연령이 높아 보인다. 3월, 이 아이가 처음 학교에 갔을 때 나에게는 걱정과 염려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짠한 마음이었다. 은 언제 어디서나 똑 부러지는 아이였고, 어린이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다방면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다. 아이를 거쳐간 모든 선생님들은 칭찬일색이었고, 문제점에 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입학 초부터 아침에 내가 학교에  데려다주지 않아도 친구와 씩씩하게 등교하는 1학년 딸이 나는 자랑스러웠다.



며칠 전이었다.

아이가 함께 등교하는 같은 반 친구의 엄마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녀는 가족끼리 식사 모임도 수차례 가지며 교류해 온 좋은 이웃다. 요는, 그녀의 딸이 더 이상 내 딸과 함께 기를 원하지 않는는 것다. 그간 아침 등굣길에 둘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는데, 그 집 아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는 것이다. 내 딸이 했다는 말과 행동, 그리고 이로 인해 그 아이가 받았다는 상처가 자세히 쓰여 있었다.



딸은 친구가 약속시간에 조금이라도 늦면 전화로 닦달을 했고, 전화를 받지 않자 "내 전화 안 받을 거면 전화번호 삭제해, 나도 너 번호 삭제할 테니까."라는 매몰찬 말을 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내 아이가 그 친구를 남겨두고 다른 아이와 뛰어서 학교에 가버린 적도 있다고 했다. 친구는 쫓아가지 못하고 혼자 서글프게 걸어갔다고 했다. 친구는 무서웠고, 매일 아침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메시지를 읽으며 내 안에서 뭔가 무거운 것이 쿵하고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건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종류의 일이었다. 나는 대체로 낙관적인 성향이고, 어떤 불행이 닥쳐도 "걱정하던 일이 결국 생기고 말았네" 혹은 "그럴 수 있지"의 방식으로 반응해 왔다. 이번엔 달랐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윽고 타인의 고통 - 친구 아이가 겪었을 마음의 상처와 아이 엄마의 분노 - 에 생각이 닿자 죽도록 미안해졌다. 얼마나 속상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고, 나에게 보낼 메시지를 쓰며 그녀가 느꼈을 감정을 헤아리자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상처 입은 모녀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나아질까.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부여잡고 나는 사과의 메시지를 썼다. 이 죄스러운 마음을 어떤 말로 전해야 할지 고민하며, 활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내 아이에 대해 아는 것들이 있다.

사회적 욕구가 높고 주도적인 성향이 강한 아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걸 즐기는 편이다.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노력하고, 상황을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애쓰며 그것이 좌절되면 곧잘 흥분한다. 감정의 진폭이 커서 기쁘거나 화낼 때 과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인간관계와 분위기를 잘 읽어내어 자신이 취해야 할 스탠스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데, 이건 다른 말로 영악한 구석이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선생님들에게서 착하고 영리한 아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비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주는 존재 - 아빠, 할머니, 외삼촌 등- 에겐 거칠고 버릇없이 구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있었다. 친동생이나 자주 만나는 사촌동생들과 놀이할 때면 집요하게 가르치려 들거군림하려는 듯한 말과 행동을 내비다.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지적하곤 했다.


-어! 동생들한테 그러면 안 돼. 좋은 말로 해야지.

-할머니한테 예의 바르게 하라고 했지.

-다른 사람 의견도 들어야지. 너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어떡하니.

-엄마가 그렇게 말했는데, 안 한다고 하더니 또 그러지?!



"다른 사람에게 좋게 하라"라는 메시지를 아이에게 전달할 때 백히 '좋지 않게' 말했던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이런 아이의 성향이 타인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걸 어째서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 그것 나의 불찰이었다.



아이는 또한 규범적인 성향이라 틀 속에서 사고하고, 규칙을 준수하다 못해 그것에 집착하는 편이다. 또한 자신이 어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남들도 따라주기를 바란다. 언젠가 비 오는 날 식당 출입구에서 동생 우산을 빼앗아 울린 적이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얘가 우산을 자꾸 물기제거기에 계속 닦잖아요. 한 번만 해야 하는 건데, 계속계속 하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못쓰고, 기계가 고장 날 수도 있는데!"라고 말했었다.



"그런 마음이었구나, 동생이 규칙을 잘 안 지켜서 답답했구나"라고 마음을 읽어주더니 아이는 분노를 가라앉고 제 동생에게 사과했었다. 아이에게 일관성 있는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이처럼 매번 아이 감정에 공감해주지못했다. 다짜고짜 "너 또 동생을 울린 거야?!" 하며 버럭 화를 낸 적이 더 잦다.



아이의 잘못에 대해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그것이 곧 나의 과오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살면서 이와 같은 일이 또 생기면 어쩌지. 아이가 학교폭력사건에 연루되기라도 하면 어쩌지. 내가 자꾸 잔소리해서 아이와의 관계가 틀어져  장차 더 큰일이 발생하면 어쩌지.


아이는 당연히 잘할 거라 믿어왔던 가 못 견디게 부끄러웠다. 한가하게 소설책이나 읽고 브런치에 글 같은 걸 쓸 시간에 본인 자녀나 더 신경 쓰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만 같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일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게감이 나를 짓눌렀다.






아이 친구의 엄마를 만나 두어 시간 동안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 모든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했고, 그녀도 마음으로 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해심이 많고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다시 학교에서 함께 놀이한다고 서, 우리는 안도했다.



나는 딸이 커가면서 내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 보다 큰 책임감을 느낀다. 내 딸은 누군가의 친구이고, 누군가의 이웃이자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타고난 기질까지 어쩌지 못하더라도, 양육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있다. 일관된 태도로 대하기, 통제하려 하지 않기, 아이를 이기려 들지 않기, '아이니까 그러는 것이다'라고 수용해 주기. 그리고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기는 생각보다 짧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글로 읽으면 쉽지만, 실제 상황에서 이 말들을 실천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이지 도를 닦는 일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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