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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Aug 07. 2023

떠나지 않는 여행

일상 속 비일상

아이들이 할머니집에 간다.

방학을 맞아 외가를 방문한 고종사촌들과 함께 1박을 한다며 신이 났다.


-너희들, 엄마 없이 괜찮겠어?


나는 터져 나오려는 기쁨의 환호성을 꾹 누르고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을 시전 하며 아이들 물건을 챙다. 손주 넷을 돌보실 부모님의 심신이 조금 염려되긴 하지만, 1년에 한두 번(방학 때) 아이들과 오롯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시는 어른들의 마음을 모른 채 할 순 없다(라고 합리화한다. 게다가 내가 관찰해 온 바, 그들은 양육과 돌봄이라는 영역에서 가히 전문가이다!). 옆에 있는 남편의 표정을 보니 나와 동일한 심정임이 분명했다. 기쁨 50, 설렘 20, 기대 20, 감사 5, 걱정 5.. 가 믹스된 복합적인 '신남'을 애써 감추는 그의 얼굴.




애들을 보내고, 우리는 곧장 50m 레인 수영장에 간다.

얼마 만에 둘이 함께하는 수영인지.

물에 몸을 담그니 수온 따뜻하다. 요즘 바깥이 덥긴 하지. 핀을 착용한 두발을 교차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발등과 발목으로 전해지는 압력에 서서히 적응한 뒤, 리듬감 있는 물살을 느낀다. 푸른 물속은 느리고, 고요하다. 중력에서 놓여나 부드러운 텍스처에 휘감긴 느낌. 나는 온전하다는 기분.


앞장선 그를 따라간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약 올리는 듯한 속도로 남편은 나를 유인한다. 벽이 보이면 아래를 보고 몸을 말아 턴을 한 뒤 힘차게 벽을 찬다. 그렇게 무심히 반복되는 왕복. 푸른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듯, 그곳에는 숨이 차오르는 평화로움이 있었다.



수영장을 나와서 점심을 먹으러 한적한 곳에 있는 식당에 갔다.

음식을 기다리며 나는 요즘 읽고 있는 책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는 우리가 대화법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누구나 말이야. 비폭력대화! 이런 걸 우리는 왜 못 배웠지? 학교에서는 왜 이런 걸 안 가르칠까?


늘 그렇듯, 다소 격앙된 내 말에 그는 적당히 반응하다가 적절히 흘려듣는다. 그리고 말이 잠시 끊긴 타이밍에 핸드폰으로 유튜브영상을 나에게 보여준다. 최근 자신이 주문한 자동차에 관한 것이다. 요즘 를 가장 생기 있게 만들어주는 주제. 이렇게 우리의 관심사는 빈번하게 흩어진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타고 영화관으로 간다.

-김혜수 조인성 그리고 류승완 감독인데, 봐야지?

-당연하지!


우리의 관심사가 합치되는 순간 또한 빈번하다.


바야흐로 여름휴가의 한복판, 주말 오후의 극장은 붐비기 이를 데 없다. 이 공간에 마스크 낀 관람객이 우리 둘 뿐이었던 게 2년 전쯤이었나? 활기차게 북적거리는 풍경이 생경하고도 익숙했다.

영화는 성공이었다. 모처럼 시원통쾌한 대중오락영화였다.



-이제 뭐 하지?

-6시네, 배고파?

-아니, 낮에 많이 먹어서 아직.

-뛰러 갈까?

-공원에?

-응,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나오자. 뛰면서 뭐 먹을지 생각해.



그는 트라이애슬론 대회를 며칠 앞두고 있다.

오늘은 수영과 달리기를 하고, 내일은 자전거를 타러 갈 계획인 것이 빤하다. 때마침 나도 달리기하고 싶었다. 날이 더워서 최근에는 러닝머신 위에서만 주로 뛰어왔다. 요즘 같은 날씨에 야외 달리기란 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하기 싫은 일이다. 의 열기가 완전히 식지 않은 어둑어둑한 시간. 우리는 러닝쇼츠로 환복하고 러닝화의 끈을 동여매고 집을 나섰다.


-역시 덥다.. 가을이 최곤데. 빨리 가을 됐으면 좋겠어.

-봄가을이 좋지. 그럼 여름 겨울 중에선? 뭐가 더 나아?

-음.. 굳이 고르라면 여름.

-왜?

-겨울 추위는 손가락에 동상 걸릴 것 같은 기분이 싫거든. 추운 날 밖에 있으면 얼어 죽을 것 같잖아. 여름의 더위도 힘들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생존이 달린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불쾌지수는 있지만 밖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 수영장에 뛰어든다든지!

-맞아. 특히 어릴  때 여름에 좋은 기억들이 많지. 평상에서 모기장 펼치고 가족들이랑 잤던 거, 친구들이랑 여름밤에 밖에서 수다 떨었던 기억. 매미소리 들으면서.

-근데 오늘 달리기는 역대급이다. 너무 더운데?

-어ㅋㅋ완전 이열치열. 그래도 햇빛은 없으니 달려보세!




한여름밤의 공원.

산책하는 이들, 자전거 타는 이들,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홀짝이는 이들. 부모님 따라 나온 어린이들.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품어주는 다정한 우리 동네의 공원이다.


우리는 주로 나란히 달리다가 길이 좁아지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었다. 바깥의 공기를 폐 속 깊이 양껏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숨이 차서 그만 멈추고 싶은 지점을 너머서자 숨통이 확 트이는 듯한 순간이 찾아왔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원시적 행위. 눈과 귀로 풍경을 담으며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일. 진짜 달리. 시원한 헬스장에서 티브이 보면서 뛰었던 것이 가상현실처럼 여겨지는 일.


 딱 5킬로만 뛰 자고 해 놓고 다 채우지 못했다. 맛있는 식당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가게 앞에서 숨을 돌리고 땀도 좀 닦아낸 뒤,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는 통통하고 실한 낙지를 밥에 올려 한입 가득 우물거리다가, 서로의 커진 눈을 마주쳤다. 낙지가 먹고 싶어서 집 근처 낙지요릿집을 검색하다가 찾은 집이라고 했다. 식당에 관해서라면 좀처럼 새로운 곳에 가지 않는 남편 낯선 시도가 대성공. 나는 고무적이라며 크게 격려했다.



밥을 먹고 집까지 다시 4km를 걸었다. 차를 타고 지나갈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이 가게가 언제부터 있었지. 여기 길이 새로 생겼네.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먹은 걸 소화시켰다.


집에 돌아와 뭔가 보람차고 충족된 기분으로 시원하게 샤워한 뒤, 상쾌한 마음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봤다. (남편은 이 프로그램의 애청자이다.) 물론  내용은 결코 상쾌하지 않았다.




다음날은 헬스장에서 근력운동을 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 쇼핑몰에 갔다. 가을 옷 몇 점 충동구매했고, 교보문고를 구경한 뒤 서점 옆 카페에서 아.를 마셨다. 커피를 앞에 놓고 나는 책을 봤고, 남편은 이어폰을 끼고 넷플릭스를 봤다. 그렇게 둘이서 카페에 3시간 넘게 머물렀다. 대화는 하지 않고 가끔 눈을 마주치며 각자의 일에 열중했다.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을 정직하게 실현한 듯, 모종의 만족감이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짬뽕을 먹었다. 군만두까지 야무지게 주문해서 맛있게도 먹었다. 짬뽕 그릇을 두 손으로 들고 마시다가 바닥이 보이자 갑자기 울적함이 밀려왔다. 배가 부른데 마음은 뭔가 섭섭한 기분. 마치 재밌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 아쉬워서 자리에서 못 일어나는 마음.


-여행이 끝난 기분이야.

-그러게. 어디 갔다 온 것도 아닌데, 꼭 여행 갔다 온 것 같다.

-애들이 없으니까 너무 비일상적이라서.. 그래서 그런 기분인 듯.

-맞네. 맛있는 거 새로운 거 먹고, 하고 싶었던  하고, 집은 숙소처럼 쓰고. 여행인데?

-안 떠나고도 여행네 우리!


작정한 건 아니지만 1박 2일 동안 우리는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집에서 밥을 먹지 않았으므로 설거지 거리가 없었고, 빨래는 그냥 좀 쌓아뒀다. 아이들이 없으니 정리 정돈할 도 없었다. 일상 속 비일상의 순간을 발견하는 이 곧 여행이라는 깨달음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이들은 까만 콩처럼 태닝 되어 돌아왔다. 야외 수영장에 무엇이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서로 먼저 말하고 싶어서 경쟁적으로 종알종알 거다. 오디오가 사정없이 겹치다가 결국 싸다. 나는 소리치고 하나는 울음이 터졌다. 분명 지난 이틀 동안 <비폭력대화>를 다 읽었는데, 머리가 하얘다. 그렇게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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