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뭘 할지 미리 계획하기보다는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다.목요일 저녁이었던가.우리는 김치찌개를 냄비째 놓고 심상하게 밥을 먹는 중이었다. 다가오는 몇몇 일정(아버님생신, 부서 회식, 골프라운딩 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공유캘린더어플을 열어보니, 이번 주말이비어있었다.
-근데 우리 이번 주말에 뭐 하지?
-음. 바다에 가서 텐트 칠까?
-날씨 괜찮아?
5월 중순이었다.
-응. 비 예보는 없네.
-그럼 가자.
-자고 올까?
-그럴까? 좋지, 재밌겠다.
-뭐 먹지?
-삼겹살이지! 라면이랑!
토요일 오후. 우리는느지막이 바다에 도착했다. 집과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있는 조그만몽돌해변. 산책하거나 잠시 머무는 사람들, 차박이나 캠핑을 하는 이들 모두를 품어주는 작은 해안이다.우리가 텐트를 세우는 동안 자매는 바다에 뛰어들어가 파도를 쫓아다녔다. 꺅-! 까르르- 새된 비명이 끊이질 않는다.신나는놀이에 몰두한 앙증맞은 강아지들이 따로 없다.
캠핑을 전혀 몰랐던 나는 지난 10여 년간변했다.그냥 같이 가주기만 해 달라던 남편을 따라 산으로 바다로 다녔다. 처음엔 정말 손가락도 까딱 안 했었다. 자매가 아주 어렸을 때라 내가 아기들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했던 것도 맞지만, 남편은 뭔가를 펴고 접는 것에 있어서 자신만의 질서와 속도가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테이블 같은 거라도 집어 들면, 어어 그냥 둬~ 아직 그거 아니야~ 저기 가서 앉아있어~하며 만류하는 식이었다. 조립에 젬병이고, 의도치 않게 물건을 파괴시키곤 하는 내 모습을 봐왔기에 불안하기도했겠지.
사람은 누구나, 의도하거나 말거나, 어깨너머로 배운다. 이제 나는 트렁크에 짐을 싣고 내리는 대략적인 순서와 다양한 가방 속 내용물들의 정체, 텐트의 뼈대를 세우는 방식 따위를 대충 안다. 목장갑을 끼고 텐트 프레임의 R과 L을 살펴 배치한 뒤 천을 씌워 오늘 우리가 머물 공간을 만든다. 둘이 같이 하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일이다.
캠핑장이 아닌 장소에서 1박을 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텐트 안에 들어가 누워바다쪽을 보니,사각 프레임 안에서사진이 움직이는 듯했다. 끝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라는 영원한 피사체가 있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모래놀이에 여념이 없다.그러고 보니이 모래놀이 장난감은첫째가 두어 살 때 해운대백사장 앞 편의점에서 산 것인데,이토록 오래가지고 놀고 있다.
해가 기울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아이들의 젖은 옷을 긴소매 상하복으로 갈아입혔다. 후리스를 한 겹 더 입히자, "아 이제 따뜻해-" 한다. 야외에서는 여러 계절의 옷이 필요하다는 것도 경험으로 안다. 잘 때 추울까 봐 잠자리에는 전기매트를 켜두었다. 이런 노지에서는 차박 때 쓰는 장비들이 유용하다.
버너에 불을 올려 고기와 소시지를구웠다. 밀폐용기에 담아 온흰쌀밥도꺼내저녁을 먹었다.집에서 늘 먹는,특별할 것 없는 음식도 야외에서 먹으면 별미가 된다. 내 것 같은 하늘과 너그러운 바람 덕분일까.
배를 채운 아이들은 텐트의 에어매트 위에서 방방뛰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세수, 양치질..그런 것 뭐 하루쯤이야. 반주를 걸치던 남편도 피곤했는지 일찍 잠들었다. 혼자가 된 나는 짙은 랜턴 불빛 아래에 앉았다. 테이블에책을올려놓고 읽다가 이따금씩 멈추었다. 바깥에서는작은 폭죽 불꽃이 팡팡 터지는 소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누군가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밤이 깊어질수록 파도소리도 커졌다. 한두 시간이 더 흘렀을까. 사람이 만들어 낸 인위적 소음은 사라졌다. 철썩철썩. 세상에파도와 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가족들은 파도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잘 자는듯했지만, 나는 어쩐지 잠을 조금 설쳤다.
아침 6시에 남편은조용히 텐트를 빠져나와 수영을 하러 갔다. 자신이 속한 바다 수영동호회 사람들과 함께.(그가 이곳에 온 내적 목적이었을 테다.) 해가 뜬 이후로 텐트내부는 빠른 속도로 데워졌다. 7시경 눈을뜬 아이들은 아빠와 수영하겠다며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뛰어갔다. 다행히도 아직 수온이 차서 물에 뛰어들진 못했다.
아이들에게 달걀프라이를 만들어 주고, 뭍으로돌아온 남편과 나는 함께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걸 운동까지 했으니 허기져서 얼마나 맛있어?
그는 라면 국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냄비는 설거지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자매가2일 차 모래놀이를 하는 동안 햇볕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파라솔을 펼쳐주었다. 나는 어린이들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딸들이 내 두 발을 모래에 파묻으며 즐거워했다. 까슬까슬한 모래의 질감이 피부의 감각을 깨웠다. 간질간질. 문득 물의 감촉을 느끼고 싶어졌다. 적정 온도의 물에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
-수영장에 갈까?
마침 첫째가 다니는 수영장이 그곳에서 멀지 않았다. 우리는 차를 타고 수영장으로 가서 잠시 물놀이를 한 뒤, 상쾌하게 샤워를 했다. 그리고 다시 해변으로.
아직 5월이지만 한낮은 뙤약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또다시 모래놀이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모래만 있으면 1박 2일 동안 싫증 내지 않고 놀 수 있다. 작년한해의 야외활동으로 그을린 자매의 피부색이이제 조금 원래의 톤으로 돌아왔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태닝이다.
잠시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 열기를 식혔다. 어른은 아이스커피를, 어린이는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바다에 오니까 너무 좋아! 엄마,집에 가지 말고 여기서 한밤 더 자면 안돼요?
그 어느 주말보다 길게 느껴진1박 2일이었다.
좋은 계절의바다에서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일을했다. 따로 또 같이. 내가 가장 좋았던 건가만히 앉아서 바다를 보는 일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땡볕아래에서 혼자 텐트를 접느라 땀에 홀딱 젖은 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있었다. 역시 노지캠핑이 제 맛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