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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Apr 22. 2023

또 밑바닥

아주 날것의 육아

내 옆에 누워 소록소록 잠든 아이를 어루만진다.

가지런한 속눈썹, 낮은 콧등, 살짝 벌린 입. 굴은 아직 아기 같기만 한데, 8살 아이는 날마다 여물어간다. 말랑말랑하기만 하던 몸은 근육이 붙어 단단해졌다. 팔다리는 콩나물처럼 쑥쑥 길어지고, 손바닥만하던 등짝도 어느새 면적을 키웠다. 이렇게 매일 10시간 동안 잠을 자며 차곡차곡 체세포를 불리는 나날이다.


머리둘레 물론 '머리'도 크는 중이다. 기질이 온순하고 체제순응적인 아이가 언젠가부터 자기 고집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그렇지, 이 거친 세상에서 마냥 순순해서는 안지. 순종적이던 아이살짝 틀을 비집고 나오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안도했다. 신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내게 모난 말을 할 때, 순간적으로 화가 난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걸 숨기는 데 자주 실패한다. 설상가상으로 아주 고약하고 저열하게 아이의 약점을 친다. 오늘도   마주했다. 몹시 비루했다.



방과 후 수업에서 한자급수시험을 준비하는 아이는 집에 와서도 공부 중이었다. 모범생답게 선생님이 시킨 대로 예상문제집을 풀고 스스로 채점을 하고 있었다. 오구오구 기특하다 하며 옆에서 지켜보는데, 답을 깨알같이  글씨로 적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 큼지막하고 가지런한 글씨체를 지향하던 아이였다. 얘가 쓴 글자를 보고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스스로도 그것에 대해 뿌듯하게 여기던 아이였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 솔아, 이거 글자가 너무 작은데?

- 응, 나는 이제 작게 쓰는 게 좋아.

- 아 진짜? 근데 엄마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너무 작고.. 그리고 여기 ㄹ은 알파벳 z 같네.

-...

- 예전처럼 크게 또박또박 쓰면 안 돼?

-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싫은데.

- 엄마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이 네가 쓴 걸 못 알아볼 텐데?

- 그래도 싫은데. 나는 이렇게 쓰고 싶어.

- (약간 화남) 왜?

- (목소리를 높이며) 그냥 그래. 꼭 크게 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 큰 글씨를 좋아할 수도 있고 작은 글씨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 그건 그런데.. 엄마가 솔이 글씨를 못 알아봐도 상관없어?

- 응 상관없어. 못 읽어도 돼. 다른 사람들한테 내가 다 맞춰야 해?!

-... 상관없다고? 와.. 되게 섭섭하다. 그러면 너 오늘밤에 엄마랑 같이 안 자는 것상관없겠네? 그리고 너 왜 엄마한테 반말로 이야기해?



매사에 의젓한 K장녀지만 아이는 혼자 잠자는 걸 여태 무서워한다. 잘 때만은 어리광 부리며 엄마 품을 파고들며,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는 아이가 가장 사랑하는 것과 가장 두려워하는 걸 안다. 너무 잘 안다. 그리고 나를 서운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8살 아이의 약한 곳에 표독스럽게 바늘을 찔러 넣었다. 원하는 걸 주지 않겠다고 협박한 데다가 반말했다며 유치하게 논지를 껴가는 옹졸까지 갖다 얹었다.


분노로 가득 찬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더니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7살까지는 곧잘 울음을 터트렸던 것 같은데, 이제 씩씩거리 울음을 참고 있었다. 아이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나를 잠시 노려봤다. 그러더니 의연한 척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물을 틀고 세수를 하는 소리가 다.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기대앉았다. 요전에 있었던 비슷한 일이 떠올라 더 부끄럽고 괴로웠다. 차분해 보이지만 정의 기복이 크고, 태생적으로 단단히 꼬인 데가 있는 나는 이런 내 밑바닥과 조우할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 어째서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은 공존하는가. 어째서 나는 매번 그 순간에 걸려 넘어지는가. 육아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한계를 맞닥뜨리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렸을 때 그 실체는 육체적 한계였는데, 점차 멘탈의 영역으로 양상이 변화하고 있다. 어려운 건 매한가지다



아이에게 어떤 로 사과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가 방으로 쭈뼛쭈뼛 들어왔다. 눈에는 아직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8살 소녀는 울먹울먹 하며 내 귀에다 대고 말했다.


- 엄마, 미안해요. 나쁘게 말한 거 잘못했어요.


아이는 엄마와 같이 못 잘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속상했다. 이런 식으로 사과를 받아내는 건 정말이지 편없는 일이다.


- 아니야, 엄마가 나빴어. 내가 나쁘게 말했어. 사과할게.

- 엄마, 오늘 엄마랑 책 읽고 같이 잘 수 있어요?


언젠가 가 더 이상 엄마랑 같이 자지 않겠다고 하면 그땐 허전해서 어쩌지.라고 걱정해 온건 사실 내쪽이었다.


- 응, 미안해. 매일 같이 자자. 책 읽어줄게. 이리 와.


모녀는 서로 꼭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나는 모처럼 목이 쉴 때까지 책을 읽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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