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태어난 지 이제 갓 백일이 지났다는 후배 부부의 상황은 다소 심각해 보였다. 전지적 남편 시점임을 감안하더라도, 젊은 부부가 첫아이를 키우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아내가 아기에게 애정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했단다. 자꾸만 애를 친정에 맡기고, 밤에 외출해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새벽에 귀가한다고 한다.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아기가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라고 직접 말했단다. 아기 아빠는 '애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따져 물었고, 갈등은 극에 치달았다. 후배의 아내는 임신과 동시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가 된 경력 단절 여성이었다.
아이가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는 말에 나는 기시감과 함께 위험 신호를 감지했다. 그 아기 엄마는 욕구가 전혀 충족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아마 자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 없이는 살아남지 못할 백일 된 아기는 마치 자신과 연결된 족쇄처럼 여겨질 것이고, 집은 감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건 수년 전 내가 느꼈던 감정이었다.
돌아보건대, 나는 산후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아기와 온종일 집에 붙박여서 반복되는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을 하는 일상이 지긋지긋해서 슬펐던 시기가 있었다. 육아서에서는 아기가 울면 욕구를 파악하여 재빨리 반응해줘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아이가 울 때 바로 달려가지 못하고 한동안 방치하곤 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 틸다 스윈튼이 유아차를 밀고 가다가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자, 공사장 옆에 멍하게 서있는 것이다. 공사장의 굉음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묻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울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못 견디는 엄마라니. 그런데 그게 나였다니. 아이는 분명 귀엽지만 나를 옭아매고 세상과 단절시키는 존재였다. 아이가 사랑스러운 건 찰나였고, 나머지 모든 순간에 아이는 나를 괴롭혔다.
매일 남편의 퇴근 시간만 기다렸던 시절이었다. 남편이 귀가하면 나는 곧바로 집을 나갔다. 타지에 살았으므로 불러낼 친구도 없었고 술도 못 했던 나는 혼자 공원에 가서 걷거나 뛰거나, 아니면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다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남편이 아이들을 재워놓았다는 걸 확인하면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그리고 종일 말하고 싶었던 걸 그에게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내가 오늘 무얼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 직장에서는 티타임이나 쉬는 시간이라도 있을 텐데 집에선 그런 것도 없다며, 집에서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나는 월급도 없다며, 대화 나눌 사람도 없다며, 나도 얼른 복직하고 싶다며, 너는 좋겠다며. 남편은 인내심 있게 내 말을 경청해 주었고,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눈물범벅이 된 나를 매번 안아주었다.
그렇게 1년가량을 버티다 보니 아이들이 점점 자라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애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내 시간을 확보하면서, 가까스로 육아라는 과업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산 세월이 쌓이면서 애정도 함께 커진 느낌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그 아기를 포함한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남들은 본능적으로 아이를 사랑하며 잘 키우는 것 같은데 나만 유독 모성애가 없는 이상한 사람 같았다. 애 키우는 걸 이토록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속내를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기에, 참 많이 외로웠던 시간이었다. 현재 7세 8세가 된 아이들을 보고 있다가 무심결에 그 시간들이 떠올라서 복잡한 마음이 될 때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하고, 인지력과 사고력이 발달하면서 사람이 되어간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보리가 가끔 친구처럼 느껴지는 순간 나는 흠칫 놀라곤 한다. 며칠 전에 보리랑 둘이서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커피집 앞에 멈춰 선 적이 있었다. 커피를 마실까 말까 내적으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보리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커피 마시고 싶어? 근데 내가 지난번에 아빠랑 말하는 게 들었는데, 엄마 커피 끊을 거라고 했잖아요?
-응.. 들었어?
-응, 있잖아. 우리나라에 커피가 없다고 생각하면 돼. 나도 쫀드기가 먹고 싶은데, 엄마가 먹지 말라고 해서 쫀드기는 없다! 없다! 하면서 참고 있어.
-어, 그래. 근데 커피가 눈에 보여가지고..
-너무너무 먹고 싶어? 못 참겠어? 그럼 내가 사줄까요? 나 할머니한테 용돈 받아서 돈 있어!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줄게.
여덟 살 딸이 사준 카페라테를 받아 들고 그 따뜻함을 두 손으로 느끼며,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와, 내가 애를 잘 낳았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아이들은 깨어있는 시간 동안 그야말로 맹렬히 논다. 그들은 잠드는 순간까지 피곤해하거나 지치지 않는다.
연휴 중 하루에는 갯벌에서 놀았는데, 자매는 3시간 넘게 모래를 파고 물길을 만들고 성을 쌓고 게를 잡으며 벌판을 뛰어다녔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서서 나도 잠시 여유를 즐겼지만 한 시간이 지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해가 지지만 않았더라면 몇 시간이고 더 놀 기세의 아이들이었다.
주말인 오늘. 자매는 집안에서 몇 시간째 각종 역할놀이에 심취하여 연기를 했다. 옷장에서 옷을 죄다 꺼내고, 색종이 수십 장을 바닥에 흩어놓고, 피아노를 뚱땅거렸다. 그러다가 별안간 놀이터로 뛰어 나가서 1시간 뒤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욕실에서 목욕을 하는 와중에도 수경을 끼고 잠수하고 풍덩 거리며 물놀이를 하였고, 욕실 바닥에 비누를 풀어 맨발 스케이트를 타고 트위스트를 춰댔다. 그들은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눕자 그제야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졸려도 책을 꼭 읽어주기를 바라기에 자매를 양쪽에 끼고 <Knight Owl>을 읽어주었다. 목이 아파서 평소처럼 열과 성을 다하지 못했고, 속삭이듯 읽었다.
-올빼미는 왜 낮에 자고 밤에 깨어있는 거야?
-올빼미가 어떻게 기사가 돼?
아이들은 연신 질문을 하다가 무시무시한 드래곤이 등장하자 흡-하고 숨을 죽였다. 감기 때문에 걸걸해진 내 목소리가 드래곤의 대사를 읽자 더 무섭게 들렸을 테다. 드래곤이 올빼미를 잡아먹지 않고 둘이 피자를 먹으며 친구가 된다는 전개에 긴장했던 자매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책을 덮고 불을 끄자 아니나 다를까, 1분 만에 코를 골았다. 마치 전원을 끈 장난감처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잠들 수가 있는 것인지 매일밤 의아하다.
잠든 아이들 사이를 빠져나오다가 둘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내 폰 갤러리에는 '잘 때'라는 폴더가 있다. 아이들이 자는 사진을 모아둔 곳이다. 잘 때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천진한 얼굴이 된다. 마침내 잠에 굴복한 그 무방비한 표정과 태평한 자세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금세 뭉클해지고 따뜻해진다. 이 귀여운 생명체들을 내가 낳았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만큼 감격적이다. 아이들이 깨어있을 때 우리는 서로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서로 질척거리지만, 애정과 사랑은 날로 깊어진다. 요즘의 내 삶은 아이들이 있어서 지속가능하다. 얘들이 아기였을 때는 왜 몰랐던 걸까 생각하다가, 지금이라도 이런 귀한 감정을 느끼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한다. 과거의 부족했던 나 또한 내가 보듬어 주기로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도 자란다.
육아가 유독 힘겨운 누군가를 떠올리다가 여기까지 왔다.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삶의 굴곡진 면은 언뜻 유사해 보여도 들여다보면 저마다 고유하게 파동 치니까. 나는 그저 알 수 없는 이 삶을 내 방식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 매일매일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