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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Oct 26. 2023

한 달 동안 가짜 가모장

시월 한 달간 남편이 출근을 안 한다.

그가 소속된 회사 공장의 셧다운, 즉 공장 전체가 가동 중지되는 기간이라고 한다. 남편이 생산팀으로 옮긴 후부터 이런 셧다운이 불규칙적으로 발생한다. 회사에 나가지 않는 기간에도 월급은 지급된다고 하니 감사한 일이다.


남편에게 여유가 생기니 급박하던 우리의 일상이 한결 느긋해졌다. 특히 아침이 그러하다.

내가 씻고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달걀을 삶고, 당근 양배추 사과를 꺼내 요거트와 함께 믹서기에 돌린다. 우리가 아침마다 마시는 이 ACC주스는 원래는 매일 아침 내가 만들던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아이들에게 줄 달걀 프라이와 쌀밥, 디저트로 먹을 바나나 혹은 사과를 썰어서 준비한다.


7살 담이는 이번 셧다운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담이는 원래 출근하는 아빠차에 실려서 가장 먼저 유치원에 등원하는 아이지만, 이번 한 달 동안 유치원 버스를 타고 등하원하기로 했다. 담이는 아침에는 토끼차를 오후에는 고래차를 탄다며 몹시 기뻐했다.


오늘 아침에 남편이 말했다.


-담아, 너 오늘도 코끼리차 타고 집에 오는 거지?


밥을 먹던 보리와 담이가 밥알을 튀기며 웃었다.


-담: 아빠, 코끼리 차가 어딨어~ 고래차야 고래차! 우하하하하 코끼리차 있으면 나 타고 싶다ㅋㅋㅋㅋㅋ

-보리: 진짜! 아빠 지난번에는 병아리차라고 그랬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


딸이 고래차를 타고 하원한 지가 몇 주가 지났건만 남편은 여전히 동물 이름을 헷갈려한다.




오후 1시쯤,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원래 그는 회사에서도 때때로 전화를 하지만, 쉬는 기간 동안에는 정말 매일같이 전화를 건다. 용건은 없다.


-뭐 해? 바빠? 밥은 먹었어?


매일 똑같은 질문을 받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휴직 중이었을 때 남편한테 전화해서 하던 말을 이 사람이 하고 있네.


-어, 급식 먹었지. 넌?(우리는 동갑이라 서로 이름을 부른다)

-난 냉장고에 닭가슴살 먹었어.

-그랬구나. 수영장 갔다 왔어?(그는 이번달에 오전 10시 수영 수업을 등록했다)

-어, 갔다 왔지. 오후에는 자전거 타러 갔다가 골프연습 가려고. 와, 쉬니까 더 바쁘네?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아(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하지는 않았다). 보리 학교 갔다 오면 간식 먹이고, 담이 고래차 픽업시간 놓치지 마~




일과를 마치고 방과 후 수업까지 끝낸 6시에 나는 퇴근을 했다.

집에 가면 밥이 차려져 있을 줄 알았는데(지난 몇 주동안 대체로 저녁밥이 차려져 있었다), 오늘은 남편이 자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아이들은 젤리를 먹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깊은 피로감을 느끼며 자매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이 시간에 젤리를 먹으면 어떡해! 저녁밥 먹어야 되는데! 젤리 그거 어디서 났어?!

-아빠가 사줬어, 숙제 다하면 젤레 먹어도 된다고 했어요!


주방 싱크대를 보니 아침 식사 때 썼던 그릇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어쩐지 조금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팔을 걷어붙이고 우당탕탕 설거지를 했다. 남편이 그 소리를 듣고 깨서 주방으로 나왔다.


-아 요즘에 수영이 좀 빡세서 내가 좀 피곤했는지.. 잠이 들어버렸네. 내가 할게 설거지. 가서 씻어~


나는 못 이기는 척 고무장갑을 넘겨주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내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묘한 감정을 감지했다. 뭔가 통쾌한 이 기분. 남편은 방금 집안일을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을 했다. 그는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출근도 안 하는 사람이 설거지도 안 해놓고 저녁식사 준비도 안 해놓고 애들한테 젤리나 사줬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무안함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미묘한 죄책감이다.


여유롭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남편이 부대찌개와 달걀찜을 만들어서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그는 본디 손이 야무지고 요리도 잘한다. 남편이 나보다 집안일을 훨씬 잘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늘 일찍 퇴근하기에 저녁 식사 준비 대체로 내 몫이었다.


-와, 요리하면서 설거지까지 했네?

-어 어서 먹어, 배고프지? 피곤하지? 오늘 학교에서 별일 없었어?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오늘 수업 너무 많았거든, 나 쓰러질 것 같애.


사실 그렇게 심하게 힘들진 않았지만 그렇게 말이 나왔다. 왠지 그렇게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밥을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집에 와서 손하나 까딱 안 하고 남이 차려준 밥을 먹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뭔가 대접받는 이 느낌. 중고딩 때 우리 엄마도 이렇게 아침저녁 꼬박꼬박 차려줬었는데..


시절이 떠올라 너무나도 아득하게 행복했다.


식사가 끝나고 남편은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 나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저 사람을 도와줘야 하는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잠이 쏟아졌다.


내가 휴직하고 집에 있을 때 남편이 하던 행동을 내가 하고 있다.

상대방이 출근을 안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집안일은 그의 일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다. 집에 있어도 얼마나 바쁜지 내가 가장 잘 알면서 말이다.


이슬아 작가는 <가녀장의 시대>를 썼는데, 나도 언젠가 가모장이 될 수 있을까. 가장이라면 역시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인데. 내 수입으로 우리 가족을 건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난다. 아무튼 얼마 남지 않은 이 가짜 가모장 노릇을 일단은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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