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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Feb 09. 2022

응급실 의사의 글 <지독한 하루>, 남궁인

책 리뷰

  어떤 수필 선생님의 강의에서 ‘에세이를 읽다 보면 아는 게 많아져서 똑똑해집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남궁인 저자의 에세이를 3권째 읽다 보니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된다. 똑똑해지는 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르던 걸 많이 알게 된 건 확실하다. 내가 일생동안 몇 번이나 가볼까 싶은 종합병원 응급실, 그곳의 상황을 이토록 피비린내 날 정도로 묘사한 글이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다양한 방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지.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어느 부위가 먼저 땅에 닿는지에 따라 몸이 어떤 식으로 박살 나는지. 칼에 맞아 양쪽 폐에 구멍이 나면 어떻게 되는지. 트럭 바퀴에 복부가 깔린 사람은 어떤 식으로 사망에 이르는지. 사람 다리 위로 지하철이 지나가면 다리가 어떤 모양으로 절단되는지. 가스관을 자르고 라이터를 켜면 라이터를 들고 있던 사람이 어떤 형체로 불타서 병원에 실려 오는지, 그리고 이들이 응급실에 도착하면 그걸 본 의사는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는지. 어떤 바이탈 사인을 보고 사망선고를 내리는지. 퇴근 후에는 어떤 심정으로 집에 돌아가는지.


  인생에서 마주하는 어떤 선택의 순간에, 이모저모 따져보고 나에게 득이 되는 쪽을 택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아주 드물게도 고통이 더 많은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쪽이 아니라면 아마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사람일 것이다. 저자가 일하던 종합병원에는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10년 동안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 피안성정재영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신건강의학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을 택하는 현실을 누가 비난할 수 있는가. 흉부외과의 긴급한 수술을 요하는 외상환자가 죽어나가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스템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사람이 의료인의 직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건 끝없이 자기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일일 것 같다. 자살을 시도하여 몸과 마음이 곤죽이 된 사람들을 1년에 천 명씩 만나야 하는 일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응급실 의료진이나 119 구급대원 같은 죽음의 최전선에 있는 분들에게는 심리적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어떤 조치가 필수적일 것 같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에서 이슬아 작가는 남궁인 작가를 ‘징그럽게 많이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가 쓰는 글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의미이다. 육체적으로 고된 것은 말한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강도 높은 병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암막 커튼을 쳐 놓은 방에서 키보드를 두드렸을 작가를 떠올려본다. 그는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책 읽기의 이유는 저마다이지만, 내가 속한 세계를 벗어난 다른 이의 세상을 간접 경험하기 위한 독서에 나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지체장애인의 글, 자영업자의 글, 비혼 주의자의 글, 판사의 글, 회사원의 글, 버스 운전사의 글, 동성애자의 글, 의사의 글, 조현병 환자의 글, 시인의 글, 퇴직자의 글, 수감자의 글, 사회초년생의 글, 비정규직의 글, 작가 지망생의 글.. 비슷한 상황에 처했거나, 동종 직업군에 속했을지이라도 그 속사정은 제각각일 것이므로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 생산될 것이다. 내가 속한 '여성 기혼 유자녀 교사'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세상에서 나는 익숙한 것들에 익숙해져서 익숙해져 있는 것도 모른 채 지낸다. 그것들은 서서히 내 안에서 침잠되면서 어떤 ‘기준’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때때로 그 기준과 동떨어진 것을 맞닥뜨릴 때 낯섦과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혹자는 ‘그런 것까지 꼭 다 알아야 돼? 내 삶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한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다. 사회의 일부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만으로도 가끔 너무 벅찰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이 불행의 근원인 경우가 너무 많지 않던가. 누군가와의 어떤 관계는 생존의 요소이다. 그 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면 좋겠다. 낯섦이 거부감으로 직결되기보다는 신선하고 새로운 깨달음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만약은 없다>의 서문에서 저자는 의대생 시절 진지하게 죽고자 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죽지 못할 거면 어디까지 치열해질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서 응급의학과를 지원했다고 썼다. 젊은 그가 죽고자 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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