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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an 06. 2024

김치를 만들다

2023년의 마지막날. 김치를 만들었다.

내 가족과 내남동생 가족, 도합 8인이 엄마집에 모였다. 우리는 평소에도 한 달에 두어 번 정도의 빈도로 만나 공동 육아를 하며 주말을 보내곤 하지만, 금년의 마지막날과 새해의 첫날이 동시에 들어있었던 그 주말은 사뭇 특별했다. 오로지 김치를 위해, 한 달 전쯤 각자의 일정을 세심히 조정하여 픽해둔 날짜였다. 한파가 다소 사그라든 따뜻한 겨울날이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시던 재작년까지 엄마는 매년 자신의 엄마와 둘이서 김장을 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해에 엄마는 혼자서는 자신이 없다며 김장을 걸렀다. 엄마의 김치를 사랑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컨대 이참에 엄마가 김장을 그만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목격해 온 김장의 풍경은 어마어마한 노동의 현장이었을 뿐 아니라 그 일이 끝난 뒤 엄마는 며칠씩 앓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엄마와 수십 년 함께 살아온 나는 다른 사실도 안다. 엄마에게 김치란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엄마는 김치에 심각하게 진심이다. 김치부심이랄까. 본인의 김치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다. 원래 먹는 것에 돈을 아끼는 법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맛있는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 매년 각지에서 최고로 좋다는 재료들을 공수한다.

"이 고춧가루 빛깔 좀 봐라, 진짜 예쁘지? 이 귀한 거 구하려고 내가......"


내가 엄마의 이런 말을 귀담아 들어왔더라면 나는 분명 좋은 식재료를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김치가 만족스럽게 담가질때면 엄마는 더없이 행복해한다.

"아유~~ 올해는 김치가 잘돼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김치를 먹을 때마다 기뻐한다.


반면에 김치 맛이 본인의 기준에 못 미치면 끝도 없이 아쉬워며 집요하게 원인을 찾는다.

"하.. 배추를 너무 오래 절여가지고 이래 짜게 됐네. 좀 더 일찍 건질 것을..."

치를 먹을 때마다 이런 회한 가득한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엄마가 올해 다시 김치를 만들기로 한건 남동생 가족 때문이다. 엄마 김치를 먹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남동생과 올케다. 그리고 올케의 부모님, 즉 사돈어른들 우리 엄마 김치를 극찬하신다는 걸 안다. 엄마가 김장을 할까 말까 고민했을 때 올케가 적극 나서서 자신도 도우며 배우고 싶다 했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나와 남편도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 것이다. 




내 남편의 부모님이 소유하신 밭에는 온갖 농산물이 자란다.

우리는 시부모님이 직접 재배하여 알맞게 절여주신 배추 60 포기를 차에 실어 가져갔다. 물먹은 배추가 어찌나 무겁던지, 카트가 없었다면 주차장에서 집까지 배추를 이동시키는 데 크게 애를 먹었을 것이다.



엄마는 전날 이미 김치 양념을 만들어 놓고 배추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욕조로도 사용하였던 거대하고 내구성 훌륭한 다라이('대야'라고 불러야 하지만 다라이가 입에 착 붙는 건 어쩔 수가 없다)에 가득 담긴 붉은 양념을 보자, 손가락으로 콕 찍어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입에 침이 고였다. 양념 만드는 과정을 제대로 한 번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엄마의 좁은 주방 바닥 전체에 테이블 비닐을 깔고, 본격 김치 만들기에 돌입했다. 절임 배추에 붉은 양념을 치대는 일. 엄마를 제외한 우리 넷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내가 고무장갑 낀 손으로 양념을 한 줌 떠서, 배춧잎 한 장 한 장 사이에 세심하게 묻히는 걸 보고 엄마가 말했다.

"그래가지고 언제 다하냐~ 이렇게 배춧잎 몇 장씩 뒤적거려 가면서 팍팍 묻혀라"     



남편과 남동생의 양념 치대기 기술은 한 포기 한 포기 거듭할수록 발전했다. 그들은 평소에도 손이 야무져서 주방일을 퍽 잘하는 자들이다. 그렇지 못한 나는 김치통에 완성된 김치를 담는 업무로 밀려났다. 남자들은 빠른 속도로 흰 배추를 맛깔스러운 붉은 김치로 둔갑시켜 나에게 전달해 주었고, 나는 그걸 통에 담느라 숨 돌릴 틈이 없었다. 힘들게 고무장갑을 벗고 잠시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오면 내 자리에 김치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양손으로 양념 묻은 배추를 들고 겉잎을 예쁘게 정돈하여 감싼 뒤 차곡차곡 김치통에 담았다. 한통 한통  가득 채워 뚜껑을 탁탁 닫을 때마다 미션을 클리어하는 듯한 성취감이 있었다. 같은 동작을 몇 시간째 반복하고 있자니 어깨가 결려왔지만, 소쿠리에 수북하던 흰 배추가 줄어가는 걸 보며 고지가 눈앞이다- 하며 버텼다. 가스레인지 위 냄비 속에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삶아지고 있었다. 수육 냄새가 구수했다.



김치를 매만지고 있노라니 자꾸 군침이 돌아서 참지 못하고 작은 배춧잎을 따서 몇 장 먹었다. 아삭아삭 거리는 식감의 새 김치. 그 매콤 짭짤 칼칼한 맛에 식욕이 폭발했다. 이 맛이지. 내가 수십 년 동안 먹어온 엄마표 김치 맛이 이거였지. 김치냉장고에 넣어두고 맛있게 익혀서 김치찌개도 해 먹고 김치볶음밥도 해 먹어야지. 그러면 엄마가 해줬던 그 맛이 나겠지.

아, 김치는 이제 나에게도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나에게 김치는 곧 엄마다.




서너 시간 만에 우리는 모든 걸 끝내고 식탁에 둘러앉았다. 함께하면 이렇게 빨리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엄마는 번 김장은 너희들이 다 했다며 사위와 아들과 며느리와 딸을 기특해했다. 

 


렇게 매년 다 함께 김장을 하다 보면 양념 만드는 법도 배울 테고, 언젠가는 엄마 없이 우리끼리 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스스로 김치를 만드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우리는 분명 엄마를 많이 그리워할 것이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김치를 바라보며 갑자기 아득하게 슬퍼지려는 마음을 붙잡았다.




수육과 김치를 먹으며 우리는 와... 하는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갓삶은 야들야들한 돼지고기 한 점에 아삭 칼칼한 김장 김치 한 조각. 이것이야말로 '행복'이라는 말의 구체적 정의임에 틀림없다.


-엄마, 이 정도면 성공이지요?

-그렇제? 이번에 사돈이 배추를 맛있게 절여주셔서 너~무 성공이다. 양념은 간이 좀 짜긴 해도 맛있제? 김치는 원래 처음에는 좀 짜야돼~ 봐라봐라 이 고춧가루 빛깔이, 김치가 얼마나 먹음직스럽냐. 진짜 잘됐네.


엄마는 생산적인 일을 끝내고 크게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십 대였을 때만 해도 내가 김치를 만들게 될 줄 전혀 몰랐다. 내가 생선을 굽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둘 다 엄마가 늘 해주던 일이었을 뿐. 나는 김치나 생선이 절실하지도 않았고, 없다고 해서 아쉬울 일도 없을 줄 알았다.


음식을 만들어서 누군가와 나누는 일에는 분명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이제 안다. 게다가 그것이 나만 만들 수 있는 거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음식으로 위로받는다는 걸 안다면, 어찌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보잘것없는 내 요리 -너덜너덜해진 생선구이나 계란버터밥 따위- 를 최고로 맛있다 좋아하는 내 아이들을 보며

사십 대의 딸은 비로소 엄마의 마음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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