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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Mar 06. 2024

자존감 낮은 사람이라

그날은 가족들과 쇼핑을 하러 간 날이었다.

새 학기가 다가오는 마당에 아이들이 입 옷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에 생각이 닿았고, 우리는 즉흥적으로 집 근처 아웃렛으로 나섰다. 점심으로 떡만둣국을 먹고 그 직후 외출을 하였는데 어쩐지 자꾸 배에 가스가 차는 기분이었다. 평소에도 가스가 잘 차는 편이지만 배출 또한 수월하게 하는 터라 큰 문제가 된 적은 없었는데 그날은 배출이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쇼핑몰에 도착하자마자 속이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 배를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나는 남편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아.. 남편, 나 배가 너무 아파.

-왜?

-가스가 찼는데 배가 터질 것 같아. 갑자기 너무 아파.


약국을 발견한 나는 뛰어들어가서 약사에게 증상을 말했다. 건네받은 액상 소화제와 알약을 그 자리에서 먹고 잠시 동안 앉아고통의 추이를 살폈다. 다행히 증상이 조금씩 완화되는 듯했다.

남편은 내 표정을 관찰하며 말했다.


-허리도 아픈데 배까지 아프고.. 요새 왜 그래?

-그러게.. 나 진짜 늙었나 보다.

뭔가 조금 서운했지만 나는 웃음으로 눙치며 아동복 코너를 찾아 발길을 옮겼다.


동갑내기 남편은 꼼꼼하고 분석적인 istp이다. 보호자적 성향이라 의지가 되지만, 우유부단하고 감정적인 나(infp)와는 s와 t가 자주 부딪친다. 아무튼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이다. 쇼핑할 때는 자신의 것은 물론 가족들 물건에도 무척 적극적이다. 내가 뭔가 집어 들면 '그거 아니야, 그 옷은 소재가 너무 더워, 이런 게 시원하지 이거 한번 입어봐' 하며 자신이 고른 옷을 피팅룸에 넣어준다. 그날도 그는 사랑스러운 두 딸의 옷을 열성적으로 골라주었다. 보리가 집어든 모자를 씌워보더니, 이 색깔보다는 녹색이 예쁘다며 굳이 녹색을 구입하게 만들었고, 담이가 고른 트위드 재킷을 보고는 실용성 없는 걸 골랐다며 혀를 찼다. 자신이 고른 간절기용 패딩 재킷을 입혀보고는 너무 잘 어울리지 않냐며 몹시 흡족해했다. 트위드 재킷이 물론 실용적인 옷은 아니지만 입학식니까 예쁘게 입어도 된다며 내가 어필했지만 그는 몇 번만 입으면 올이 다 풀릴 거라며 구 반대했다.  말이 맞기도 했기에 나와 담이는 결국 패딩 재킷을  선택했다.


옷을 사고 신발을 사러 이동했다. 운동화마니아인 남편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는 나이키매장이었다. 나는 보리가 최근에 구입한 나이키와플의 성인용 모델을 발견하고 직원에게 사이즈를 문의해 피팅해 보았다. 모녀지간에 똑같은 신발을 신고 싶다는 순수하고도 단순한 욕망이었다. 사이즈가 잘 맞기에 사고 싶다는 의사표현으로 남편에게 어때 보이냐고 물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신발은 발볼이 좁아서 불편하다, 그거 말고 에어포스가 훨씬 예쁘지 않냐...아..

거듭된 거절에 나는 빈정이 상했다. 보리도 말했다.

아빠는 왜 아빠 것도 아닌데 자꾸 아니라는 거야?

나는 그러게 말이다~~라고 했고 남편은 의기양양하게 했다.

아빠는 너희들더 예쁘고 더 어울리는 거 사도록 도와주는 거지~!!


그때였다. 나는 갑자기 다시 배가 아파옴을 느꼈다.

-아.. 여보 나 또 배가 아파...

딸들은 엄마 괜찮아? 하며 걱정했고 남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되겠다.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쇼핑은 갑작스레 중단되었고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기분이 상한 상태에서 배까지 아팠던 나는 신경에 날이 서는 것을 느꼈다. 에 타자마자 남편에게 쏘아붙였다.


-아프다고 하는데 괜찮냐는 말은커녕 대신 집에 가자 집에 가자? 너무한 거 아냐? 당신은 내가 걱정도 안 되니? 그리고 쇼핑할 때 내가 고르는 건 죄다 별로라고 하잖아. 자꾸 그러니까 나는 내 취향이 되게 별로인가 생각돼서 속상해. 아니 내가 원하는 걸 그냥 좀 사면 안되나? 그리고 반대를 할 때 하더라도 말 좀 부드럽게 할 수도 있지 않아?


남편은 다소 당황한 듯 잠시 침묵이었다.

-아, 그게 기분이 나빴어?

-어. 완전.

-아.. 걱정되니까 집에 가서 빨리 쉬게 해주려고 한 건데. 그리고 물건 고를 때는.. 그건 그냥 물건 얘기잖아. 너는 가끔 뭐든 되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거 알아? 물건에 대한 얘기가 너라는 사람의 취향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기분이 상한 거지? 그거 되게 자존감 낮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인데.


자존감..?! 저 말하는 싸가지. 섬세함이라고는 1도 없는 팩트폭격자. 내가 자존감이 낮다는 거 나도 아는데, 그 지점을 정확히 찌르다니. 화가 치밀어서 발끈할 뻔했지만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받아칠 차인데 침묵이 이어지자 뒷좌석에 탄 아이들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는 재잘거림을 멈췄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래.. 저것은 그저 맞는 말일뿐이다..

 

-남편, 이럴 때 보면 너는 참 극 T다.. 참으로 랑 정반대야.. 그렇지? 나는 말이야, 같은 말을 해도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게 배려하면서 친절하고 다정하게 하는 사람이 좋더라.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기분 상할 것 같으면 굳이 안 해도 돼고요. 좀 노력해 줄 수 없을까?


이들을 의식했는지 남편도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가다듬었다.

-그게.. 그러니까.. 이런 말이 너한테 상처가 된다는 거지?

-어. 나는 그런 말에 상처를 받아. 자존감이 좀 낮거든. 너랑 다르게 느끼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어?

-... 내가 맞춰야.. 하는 거지?

-그러게.. 내가 당신의 그 무신경하고 객관적인 말에 상처 안 받도록 노력 좀 해야 하는 걸까? 어느 쪽이 더 수월할까?

-음.. 내가 노력할게.. 배 많이 아팠어? 좀 괜찮나?


뒤늦게 들은 괜찮냐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지며 통증이 완화되는 것 같았다. 역시 스트레스가 증상을 악화시켰던 건가. 집에 돌아와서 배에 온찜질을 하며 누워있으니 컨디션이 한결 나아졌다. 아이들은 신나게 새 옷을 입어보며 행복해했고, 그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떤 사태를 꽤나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맞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내 제안을 거절하면 그 제안을 재검토하기보다는 나 자체가 거절당했다고 느끼곤 한다. 그래서 어릴 땐 별것 아닌 일로 마음 앓이 하느라 긴 시간을 소모했다. 나이가 들면서 단단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이런 면모가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속절없이 우울해진다. 내가 이렇다 보니 내 기준으로 타인을 대하게 되는 것도 문제다. 혹여 상대방이 상처받을까 걱정 고민 하느라 생각이 많아져서 관계 자체에 지쳐버리기 일쑤다. 알고 보면 남편처럼 시종일관 무덤덤한 사람들도 많던데 말이다.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기. 자기 자신과 친해지기. 이런 걸 통해 마음이 평온해지는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렇게 글도 쓰고 책도 읽고 마음공부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실패를 마주한다. 예측불가능한 지독한 실패들을 말이다.


하나 위안이 되는 건 더 이상 그때마다 번번히 자기 연민에 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존감 낮다는 말에 여전히 발끈하지만, 내가 그런 걸 뭐 어쩌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마음이 그렇다. 그런 마음을 너무 많이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말자. 타인의 힘이 아닌 나의 힘으로 나를 사랑해야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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