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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Mar 08. 2024

귀염둥이, 학교에 가다


지수야, 나 내일부터 아침에 같이 못 갈 것 같아. 내 동생이랑 가야 해서. 응 그래~



등교 첫날 저녁. 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


2학년 보리와 1학년 담이 새 학기 첫날 처음으로 같이 학교에 갔다. 작년 내내 함께 등교하던 보리의 친구들 세 명도 함께였다.


"길이 너무 복잡하고 람이 많으니까 좀 어려웠어."


동생을 챙겨야하는 마당에 여럿이서 함께 움직여야 해서 불편했는지 내일부터는 친구들과 같이 못 가겠단다. 첫날이라 많은 신입생 부모들이 아이를 데려다줬을 테고 비까지 내려 학굣길이 더욱 붐볐을 테다. 이 사태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리가  자신의 친구들이 아닌 자신의 동생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나는 감사하고 뭉클했다. 기특하기도 하지, 진짜 언니 노릇을 하다니.


이 나란히 손잡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마침내 왔다.

연년생 자매가 아기였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아기띠로 담이를 메고 보리 손을 잡고 걸을라치면 보리는 금세 징징댔다. 나도 안아달라고. 외동딸이었다면 원할 때 언제든 원 없이 안아줬을 나이였다. 몸도 마음도 늘 고단했던 초보 엄마는 첫째를 따끔하게 야단쳤었다. "담이는 못 걷잖아. 엄마가 어떻게 둘을 안아. 너 자꾸 그렇게 떼쓸래?!" 다정은 체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육아를 통해 깨달았던 시절이다. 보리는 한순간도 담이를 질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태어나 보니 경쟁자가 떡 버티고 있었던 담이도 생존력이 탁월했으므로 둘의 싸움은 일상이었다. 아마도 싸우다 정들었을 자매. 시간이 바꿔놓은 아이들의 모습이 새삼 벅차고 경이롭다. 




담이가 입학을 했다.

키도 또래보다 작고 말할 때 아직도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내 둘째, 막둥이, 귀염둥이. '이면지'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 "엄마, 면지가 누구야?"라고 묻고, 물티슈가 다 떨어졌다는 말에 "어디서 떨어졌는데요?"라고 묻는 천진난만한 내 귀염둥이가 '학생'이 되다니. 1학년 3반 18번이라고 노트에 또박또박 자기 이름을 눌러쓰고 있는 작은 손을 나는 생경하게 바라본다.


바로 일 년 전 첫째 보리를 학교에 보내본 나름 경력직 학부모인지라 긴장과 걱정은 덜하다. 아닌 게 아니라 학교를 보내보니 둘째 담이가 제 언니보다 훨씬 당차고 독립적이다. 어제는 솔이가 먼저 하교했기에 내가 담이를 데리러 갔었다. 교문 근처에 정차해 기다리고 있는데 담이가 혼자 교문을 나서서 집 쪽으로 털래털래 걸어는 것이었다.


"학교 끝나면 가방에 핸드폰 켜서 엄마한테 전화해, 데리러 갈게." 그렇게 거듭 말했는데, 전화해 보니 폰은 꺼져있다. 커다란 책가방과 키 만한 배드민턴 라켓을 등에 맨 꼬맹이는 무심하고 씩씩하게 집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작년 요맘때 보리는 학교끝나면 득달같이 전화해서 엄마 목소리를 들어야만 안심했었는데. 집에 걸어오는 내내 엄마 혹은 아빠와 통화를 했던 첫째와 등교 첫 주부터 늠름하게 혼자 귀가하는 둘째라니. 자매가 이렇게 다르다.


담이의 뒷모습을 더 오래 보고 싶어서 차로 서행하며 뒤따라갔다. 횡단보도 옆에 차를 세우니 담이가 그제야 엄마차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 엄마다!!" 리는 반갑고 애틋해서 마주 보고 웃었다.




담이는 입학식날부터 기분이 들떠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제 언니와 대조적으로 긴장과 걱정보다는 설렘과 기대가 큰 아이다. 할머니가 사준 새 옷을 입고 새 가방을 메고, 엄마 아빠 손을 양쪽으로 잡고 방방 뛰었다. 강당에서 낯선 친구들과 줄을 서서도, 교실에 들어가서 처음 보는 선생님과 인사할 때도 생글생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행사가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그렇게 좋아? 귀염둥이야?" 했더니 갑자기 주위를 의식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이제부터 그렇게 부르지 마."

"아니 귀염둥이를 귀염둥이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불러!!"  나는 진심을 담아 서운함을 표출했지만 꼬맹이 신신입생은 이제부터 본인의 이름을 불러달라며 정색했다.




그날밤 샤워 후 우리의 마사지타임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마사지가게 사장님이 되었다.

-손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보죠?


꼬맹이의 작은 등과 엉덩이에 베이비오일을 듬뿍 펴 바르며 가볍게 압을 준다. 연두부 같던 아기 피부와 말랑하기만 하던 살이 조금씩 여물어감을 느낀다.


-네 사장님 제가 학교를 갔다 오느라 바빴거든요.

-오 학교에 가셨어요? 학교는 어땠나요?

-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이 머리도 길고 착해요.

-오 그래요? 잘됐네요.


척추 마디마디를 양손 엄지로 꾹꾹 눌러주자 담이는 간지럽다며 호들갑을 떨며 좋아한다. 보드라운 아이 피부를 마음껏 만질 수 있는 이 시간은 나에게도 선물이다.

-그럼 오늘 제일 좋았던 건 뭐였나요 손님?

학교에서 보고 듣고 있었던 일 중에 무얼 말하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대답은 의외였다.


-지금요. 지금이 제-일 좋아요.



스스로 좋은 대접을 받아본 사람이 남에게 좋은 대접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뜻한 샤워, 영양가 있는 식사, 포근한 침대, 좋은 향기가 나는 로션, 그리고 가족과 나누는 다정한 말들.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안전하다는 감각, 수용받는다는 느낌, 사랑이 가득한 집은 무릇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최전선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아이들에게 값비싼 사교육을 시키거나 고급 브랜드의 옷을 입히지는 못하지만 질 좋은 잠옷은 사 입힌다.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재밌는 책을 왕창 빌려와서 읽어준다.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건네고 아침저녁으로 으스러질 듯 껴안아준다. 젖은 머리를 정성껏 말려주고 눈도 코도 입도 콧구멍도 사랑스럽다고 알려준다. 내 딸로 태어나줘서, 나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네가 무얼 해도 엄마는 너를 응원한다고 눈을 보며 말한다. 사랑 많은 아이는 분명 누군가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이 될 거라 믿는다.



미동 없이 엎드린 아이의 발바닥을 꾹꾹 눌러주고 있었다. 종일 뛰어다니느라 고단했을 작은 발. 굳은살이라고는 없는 보들보들한 발. 늘 그렇듯 마사지 도중에 잠든 줄 알았는데 담이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귀염둥이라고 불러도 돼. 우리 둘이 있을 때..



마음속 깊이 사랑이 넘쳐흐르는 기분이다. 귀염둥이가 또 귀염둥이 했다. 귀여우면 왜 깨물어주고 싶은지 처음 알게 한 것도 이 아이였지.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있다면 정말이지 이 아이는 그 일을 이미 다했다. 사랑스러움이라는 말 뜻을 적확하게 나에게 전한 것. 그 사랑으로 나의 세계를 확장시킨 것. 남은 생동안 아이가 피어나는 모습을 지금처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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