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보리와 1학년 담이는 새 학기 첫날처음으로 같이 학교에 갔다. 작년 내내 함께 등교하던 보리의 친구들 세 명도 함께였다.
"길이 너무 복잡하고 사람이 많으니까 좀 어려웠어."
동생을 챙겨야하는 마당에 여럿이서 함께 움직여야 해서 불편했는지 내일부터는 친구들과 같이 못 가겠단다. 첫날이라 많은 신입생 부모들이 아이를 데려다줬을 테고 비까지 내려 학굣길이 더욱 붐볐을 테다. 이 사태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리가 자신의 친구들이 아닌 자신의 동생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나는 감사하고 뭉클했다. 기특하기도 하지, 진짜 언니 노릇을 하다니.
둘이 나란히 손잡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마침내 왔다.
연년생 자매가 아기였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아기띠로 담이를 메고 보리 손을 잡고 걸을라치면 보리는 금세 징징댔다. 나도 안아달라고. 외동딸이었다면 원할 때 언제든 원 없이 안아줬을 나이였다. 몸도 마음도 늘 고단했던 초보 엄마는 첫째를 따끔하게 야단쳤었다. "담이는 못 걷잖아. 엄마가 어떻게 둘을 안아. 너 자꾸 그렇게 떼쓸래?!" 다정은 체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육아를 통해 깨달았던 시절이다. 보리는 한순간도 담이를 질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태어나 보니 경쟁자가 떡 버티고 있었던 담이도 생존력이 탁월했으므로 둘의 싸움은 일상이었다. 아마도 싸우다 정들었을 자매. 시간이 바꿔놓은 아이들의 모습이 새삼 벅차고 경이롭다.
담이가 입학을 했다.
키도 또래보다 작고 말할 때 아직도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내 둘째, 막둥이, 귀염둥이. '이면지'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 "엄마, 면지가 누구야?"라고 묻고, 물티슈가 다 떨어졌다는 말에 "어디서 떨어졌는데요?"라고 묻는 천진난만한 내 귀염둥이가 '학생'이 되다니. 1학년 3반 18번이라고 노트에 또박또박 자기이름을 눌러쓰고 있는 작은 손을 나는 생경하게 바라본다.
바로 일 년 전 첫째 보리를 학교에 보내본 나름 경력직 학부모인지라 긴장과 걱정은 덜하다. 아닌 게 아니라 학교를 보내보니 둘째 담이가 제언니보다 훨씬 당차고 독립적이다. 어제는 솔이가 먼저 하교했기에 내가 담이를 데리러 갔었다. 교문 근처에 정차해 기다리고 있는데 담이가 혼자 교문을 나서서 집 쪽으로 털래털래 걸어가는 것이었다.
"학교 끝나면 가방에 핸드폰 켜서 엄마한테 전화해, 데리러갈게." 그렇게 거듭 말했는데, 전화해 보니 폰은 꺼져있다. 커다란 책가방과 키 만한 배드민턴 라켓을 등에 맨 꼬맹이는 무심하고 씩씩하게 집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작년 요맘때 보리는 학교가 끝나면 득달같이 전화해서 엄마 목소리를 들어야만 안심했었는데. 집에 걸어오는 내내 엄마 혹은 아빠와 통화를 했던 첫째와 등교 첫 주부터 늠름하게 혼자 귀가하는 둘째라니. 자매가 이렇게 다르다.
담이의 뒷모습을 더 오래 보고 싶어서 차로 서행하며 뒤따라갔다. 횡단보도 옆에 차를 세우니 담이가 그제야 엄마차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 엄마다!!"우리는 반갑고 애틋해서 마주 보고 웃었다.
담이는 입학식날부터 기분이 들떠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제 언니와 대조적으로 긴장과 걱정보다는 설렘과 기대가 큰 아이다. 할머니가 사준 새 옷을 입고 새 가방을 메고, 엄마 아빠 손을 양쪽으로 잡고 방방 뛰었다. 강당에서 낯선 친구들과 줄을 서서도, 교실에 들어가서 처음 보는 선생님과 인사할 때도 생글생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행사가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그렇게 좋아? 귀염둥이야?" 했더니 갑자기 주위를 의식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이제부터 그렇게 부르지 마."
"아니 귀염둥이를 귀염둥이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불러!!" 나는 진심을 담아 서운함을 표출했지만 꼬맹이 신신입생은 이제부터 본인의 이름을 불러달라며 정색했다.
그날밤 샤워 후 우리의 마사지타임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마사지가게 사장님이 되었다.
-손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보죠?
꼬맹이의 작은 등과 엉덩이에 베이비오일을 듬뿍 펴 바르며 가볍게 압을 준다. 연두부 같던 아기 피부와 말랑하기만 하던 살이 조금씩 여물어감을 느낀다.
-네 사장님 제가 학교를 갔다 오느라 바빴거든요.
-오 학교에 가셨어요? 학교는 어땠나요?
-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이 머리도 길고 착해요.
-오 그래요? 잘됐네요.
척추 마디마디를 양손 엄지로 꾹꾹 눌러주자 담이는 간지럽다며 호들갑을 떨며 좋아한다. 보드라운 아이 피부를 마음껏 만질 수 있는 이 시간은 나에게도 선물이다.
-그럼 오늘 제일 좋았던 건 뭐였나요 손님?
학교에서 보고 듣고 있었던 일 중에 무얼 말하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대답은 의외였다.
-지금요. 지금이 제-일 좋아요.
스스로 좋은 대접을 받아본 사람이 남에게 좋은 대접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뜻한 샤워, 영양가 있는 식사, 포근한 침대, 좋은 향기가 나는 로션, 그리고 가족과 나누는 다정한 말들.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안전하다는 감각, 수용받는다는 느낌, 사랑이 가득한 집은 무릇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최전선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아이들에게 값비싼 사교육을 시키거나 고급 브랜드의 옷을 입히지는 못하지만 질 좋은 잠옷은 사 입힌다.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재밌는 책을 왕창 빌려와서 읽어준다.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건네고 아침저녁으로 으스러질 듯 껴안아준다. 젖은 머리를 정성껏 말려주고 눈도 코도 입도 콧구멍도 사랑스럽다고 알려준다. 내 딸로 태어나줘서, 나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네가 무얼 해도 엄마는 너를 응원한다고 눈을 보며 말한다. 사랑 많은 아이는 분명 누군가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이 될 거라 믿는다.
미동 없이 엎드린 아이의발바닥을 꾹꾹 눌러주고 있었다. 종일 뛰어다니느라 고단했을 작은 발. 굳은살이라고는 없는 보들보들한 발. 늘 그렇듯 마사지 도중에 잠든 줄 알았는데 담이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귀염둥이라고 불러도 돼. 우리 둘이 있을 때..
마음속 깊이 사랑이 넘쳐흐르는 기분이다. 귀염둥이가 또 귀염둥이 했다. 귀여우면 왜 깨물어주고 싶은지 처음 알게 한 것도 이 아이였지.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있다면 정말이지 이 아이는 그 일을 이미 다했다. 사랑스러움이라는 말 뜻을 적확하게 나에게 전한 것. 그 사랑으로 나의 세계를 확장시킨 것. 남은 생동안 아이가 피어나는 모습을 지금처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