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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Mar 13. 2024

제법 안온한 날

오늘 아침 요가는 빈야사였다.

앉은 자세에서 말단부터 풀어내는 평소와 달리 수리야나마스까르(태양경배자세)에 곧장 진입했다. 초반부엔 천천히, 아도무카 스바나아사나(견상자세)에서 머물며 5회 호흡했다. 아침 내내 굳어 있던 근육과 세포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계처럼 일련의 동작을 반복하며 몸은 데워진다. 멈춰서 호흡하는 횟수를 줄이고 시퀀스의 속도를 높이자 숨이 가빠진다. 전굴과 후굴을 오가는 각도가 커진다. 무릎을 바닥에 대던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에서도 무릎을 떼고 내려가기 시작한다. 두 팔로 체중을 버티며 팔 굽혀 펴기 자세로 내려가기를 반복하자 팔과 어깨가 후들거렸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상완이두근이 찢어질 듯 압박감이 고조되었다. 손목도 아파왔다. 신체적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잡생각들 진작 소멸음을 알아챘다. 오늘 요가 끝나고 점심으로 뭐 먹지? 하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늘 그렇듯 시퀀스의 중반쯤 흘러가다가 오늘의 주제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골반 정렬과 후굴인 듯했다. 에카파다 라자 카포타 아사나(비둘기자세)와 하누만 아나사(앞뒤로 다리 찢기)까지 마치자 후 몸이 탈탈 털린 듯 후달거렸다. 에너지가 채워짐과 동시에 후덜덜해지는 기분이라니. 역시 아직 체력이 모자라다. 근력 운동을 조금이라도 병행해서 힘을 끌어올려야겠다고 다짐하며 우르드바 다누라 아사나를 했다.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만끽한 뒤, 할라아사나(쟁기자세)로 유지하며 깊은 호흡을 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치열하게 느끼는 고요한 순간이었다.



요가원을 오가는 왕복 30분 동안은 운전하며 팟캐스트를 듣는다.

영어리스닝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주로 영어로 된 콘텐츠를 들어왔는데, 최근에는 여둘톡을 듣는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저자 황선우, 김하나 작가가 공동 진행하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이다. 나는 특히 김하나 작가의 팬이자 그 책의 애독자였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척 유쾌하고 웃기고 재밌고 유익하다. 두 사람이 사용하는 차분하고 정돈된 언어가 귀에 쏙쏙 꽂힌다.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유와 경험이 풍부한 언니들의 통찰이 나에게 다방면으로 생각할 거리를 준다. 음미체(음악 미술 체육)있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도 너무나 마음에 든다. 



집에 돌아와서 잡채를 만들었다.

뜬금없이 잡채가 먹고 싶어진 것이다. 냉장고에 무엇이 있나 헤아려보니 양파, 삼겹살, 당근, 새송이 버섯.. 당면만 없네. 집 앞 슈퍼마켓에서 당면을 하나 사들고 집에 왔다. 차에서부터 듣던 팟캐스트를 이어서 들으며 채소를 썰고 고기에 밑간을 하고 당면을 삶았다. 지금 넉넉하게 만들어두면 점심으로 먹고, 저녁때 애들 반찬으로도 줄 수 있다. 남편은 오늘 회식이라고 했으니 우리 세 모녀는 반찬 하나만 두고 가볍게 저녁을 먹으면 된다.(우리 집에 식욕과 식탐 넘치는 분은 남편이 유일.. 식비 절약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내 손으로 음식다운 음식을 만드니 뭐랄까, 자아 효능감이 높아지는 재밌는 기분이었다. 요리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이 아닐 수 없다.



밥을 먹고 책을 들고 안락의자에 앉았다.

창가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까무룩 졸았다. 역시 책을 읽으려거든 불편한 의자에 앉아야 했는데. 낮잠을 자도 괜찮다고 내심 생각했던 거다. 대낮에 잠들어버려도 상관없는 이런 여유라니. 나는 벅차게 행복한 사람이다. 학교에서는 공강 시간에 여교사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곤 했다. 도저히 자지 않고 버틸 수 없을 때 핸드폰 알람을 맞춰놓고 십오 분 정도 눈을 붙였는데, 그 짧은 시간에 꼭 악몽을 꿨다. 종이 울리는 걸 못 듣고 휴게실에서 계속 자다가 수업에 못 들어가는 꿈이었다. .. 정말이지 서늘한 공포였다.


 



집 앞에 있는 작은 인조잔디 운동장에 초등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간. 내 딸들도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아침에 둘이 나란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집을 나선 사랑스러운 자매를 떠올리자 입꼬리가 올라간다.



바깥바람 잔뜩 묻히고 집으로 들어온 아이들이 재잘거린다. 적막하던 집안에 갑자기 오디오가 마구 겹친다.

-엄마 오늘 급식 디저트로 뭐가 나왔게!? 바로바로~~~ 마카롱! 딸기 마카롱!!

-근데 엄마, 오늘 선생님이 급식실에서 마카롱을 하나 먹고 하나는 주머니에 넣어가더라? 내가 다 봤어. 우리 선생님이 마카롱 좋아하나 봐.



잡채를 데워서 먹여주자 둘은 맛있다며 엄지 척을 한다. 가장 허기질 시간. 이 시간엔 뭘 먹어도 맛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잠들기 전까지는 오롯이 아이들과 나만의 시간이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부를 봐주고, 책을 읽어주고, 샤워 후 머리를 말려주고 로션을 발라주고.. 셋이 침대에 눕는다. 아빠가 늦게 오는 날은 우리 셋이 나란히 안방 침대에서 잠든다. 자기 전에 오늘 감사했던 일을 한 가지씩 말하는 우리의 리추얼도 잊지 않는다.

-나는 오늘 줄넘기에서 이단 뛰기 연속 세 개 해서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마카롱이 나와서 감사합니다. 아! 잡채도!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세 사람의 체온으로 침대는 금세 데워진다. 아이들은 1분 만에 잠에 빠져든다.


한나절은 나를 돌보고, 남은 시간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날들.

쫓기지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제법 안온한 날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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