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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Mar 09. 2022

내 삶의 말들, <도서관의 말들>

책 리뷰

  유치원 하원 시간이 1시간 채 안 남았다. ‘오늘은 정말 반납만 하고 돌아와야지’ 다짐했지만 역시나. 또다시 이끌리듯 서가 사이로 빠져들어가서 바쁜 시선으로 책등을 스캔하며 서성인다. ‘혹시 오늘도 운명 같은 책을 만날지 모르잖아?’ 하면서. 평소 자주 대는 핑계처럼 ‘도서관에 발목 잡히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거기서 나오기 싫어하는 거라는 걸 이제는 인정하자.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만났다.    

 

  제목이 무려 <도서관의 말들>이다. 저자는 도서관이 너무 좋아서 사서가 되었다는, 지금은 1인 출판사를 통해 책을 만든다는 작가이자 도서관 덕후이다.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을 펴낸 유유 출판사의 책이고, 구성도 유사하다. 왼쪽 페이지는 다른 책에서 가져온 인용문, 오른쪽 페이지는 작가의 글이다. 도서관에 관한 그 모든 인용문도 주옥같고, 도서관에 관한 저자의 글 한 꼭지 한 꼭지에 빈틈없이 공감했다.     


  도서관에서 내 안의 무언가를 위로받고 채우고, 희열을 느끼며 충만해졌던 그 숱한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나는 서점보다 도서관을 좋아하는지, 왜 더 이상 책을 사서 집에 전시하지 않는지. 왜 그렇게 그 공간과 그곳에 머무는 시간을 좋아하는지. 마치 내가 쓴 글처럼 내 마음을 표현한 문장들에 감동했다. 문장력이 한없이 부족한 나를 대신하여 진솔하고 절묘한 표현들로 거침없이 내 심정을 표출해 준 글이랄까. 작가님의 글이 너무 반가워서 감사한 마음마저 든다.



도서관의 좋은 점은 바로 이거다. 운명의 책을 발견하기 위해 기를 쓰고 헤집지 않아도 우연한 만남이 언제든 기다리고 있다. 책방 주인, 서점 상품기획자 MD, 출판사 마케터 같은 중개인 없이 내가 직접 만나는 나만의 책은 얼마나 애틋하고 특별한가. 게다가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스트레칭을 하다 보면 어느새 통증도 완화되고 덩달아 울적했던 기분도 나아진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다리가 붓고 목과 허리가 아파도 달리 갈 곳이 없어서 서가 사이를 산책했는데, 이제는 아플 때 생각나는 곳이 도서관 서가가 되었다. 서가에 꽂힌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발이 없으니 먼저 찾아가지 못할 뿐 책도 사람을 기다린다. 나에게 꼭 맞는 책을 만나고 싶고, 책을 통해 삶이 조금이라도 변화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꿈이 있듯 책도 그렇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의 마음과 행동이 모여 결국 그 책이 된 거니까.   

P.89  


특별한 목적 없이 도서관에 드나들었던 서른 안팎의 나날을 나는 내 인생의 암흑기라고 생각했다. 취업과 전혀 상관없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시간을 놀렸다. 또래 친구들이 한창 직장에 다니며 각자의 능력을 키워 나가고 있을 때 나는 천분의 일쯤 되는 확률의 등단을 막연히 꿈꾸며 아무도 읽어 주지 않을 소설을 썼다. 매일 도서관에 갔지만 그 이유로 내 가족과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를 걱정했다. 정말 모두가. 원래도 그랬지만 나는 해가 갈수록, 아무것도 아닌 날이 이어질수록 더욱 소심하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그런 내게 도서관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었다. 인격을 갖춘 대상이었다. 따뜻하거나 시원한 실내 온도는 도서관의 체온이었고,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 속 좋은 문장은 도서관의 말이었다. 나는 더욱 자주, 더욱 간절한 마음이 되어 도서관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도서관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받아 주었다. 도서관은 내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기 전에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몸에서 ‘느끼는 사람'과 쓰는 사람'을 구분하게 해 주었고 이미 그런 경험을 했던 다른 많은 이의 글을 내게 보여 주었다.     

P.171


대형 서점의 주제 분류에는 '성공담' 분야가 있다. 주로 자기 계발서와 에세이로, 용기를 북돋워 주거나 새로운 도약을 제안하는 긴 제목 아래에는 치아를 보이며 활짝 웃고 있는 저자의 사진이 보인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살아 봐. 그럼 너도 성공할 수 있어. 예전부터 그런 책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성공에 대해 자꾸만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실패를 더욱 구체화시켜 한 곳에 내모는 일인 것 같았다. 성공이 없으면 실패도 없는데……. 다행히 도서관에는 그런 식의 분류가 따로 없다. 책의 표지를 가린 서가에는 책등의 제목만 보일 뿐이다. 그 사이에서 내가 고른 책 속에는 언제나 내면의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 외로운 사람, 인생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거나 아예 없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런 책을 읽다가 의외로 엉뚱하고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구석을 발견할 때면 아무도 모르는 세상의 비밀을 캐낸 듯한 희열을 느꼈다. 다 읽고 나면 책 속의 인물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그게 곧 세상을 바라보는 내 진심이 되었다.    

P.181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포기하고 도서관에 갈 것."

나는 이 문장이 왜 이리도 마음에 들던지. 이 대목을 몇 번씩 다시 읽다가 멈춘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마치 이런 기분이었다. 내가 믿고 있는 어떤 것, 그러니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아 있는 보루가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서도 인정받은 기분, 그 사람은 스티븐 킹이기도 하고, 제이크 에핑이기도 하고, 그의 대학 시절 교수이기도 하지만 감사하게 도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여 줄 여러분이기도 하다. 그 상상만으로도 올해 가을밤의 독서가 얼마나 황홀했는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P.211


글 작성일 20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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