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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May 30. 2024

아홉 살 보리

나의 첫딸 보리는 9세, 올해 2학년이다.

2학년 3반 22번. 키 125cm, 몸무게 20.5kg. 마른 몸에 조그마한 얼굴, 길쭉길쭉한 팔다리가 여리여리하다. 아기 때부터 보리는 먹는 일 도통 관심이 없다. "또 밥 먹어야 돼? 벌써?" 아이는 차려진 밥상을 보며 한숨을 쉰다. 좋아하는 반찬 - 달걀찜, 카레, 곰국 - 을 내줘도 작은 밥 한공기만 딱 먹고 식탁을 벗어난다. 숙제를 마쳤을 때의 얼굴로. 편식도 심했지만 한해 한해 나아지고 있다. 식습관에 관해서는 어쩜 어릴 때 나와 소름 끼치게 똑같다.



뼈가 가늘고 몸도 빼빼하지만 운동 신경은 좋은 편이다.  방과후 학교에서 음악줄넘기와 배드민턴 수업을 듣고 있는데, 두 종목 다 재밌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이단 뛰기를 연속 10개 했다며 한껏 고양되었다. 주말 가는 수영 강습에서는 접영을 배우는 중이다. 아이가 속에서 유려한 웨이브로 물살을 타는 걸 보고 있자 감개가 무량했다. 보리는 15개월이 되어서야 걸음마를  늦된 아기였. 그런

내 딸이 어느새 저만치 자라서 제 몸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다.



몸만 크는 것이 아니다. 말은 또 어떠한가. 보리는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해 뒀다가 어른처럼 말하고 싶어 한다.


남편이 늦게 귀가한다고 연락 왔던 어느 날 보리가 말했다.

엄마, 오늘 친구들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해도 돼요? 신랑 없잖아?

나는 신랑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는데, 대체 어디서 뭘 듣고 온 거지?


하늘이 맑았다 흐렸다를 반복하던 어떤 날창밖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날씨가 번가락번가락 하네?

'오락가락'과 '번갈아'를 조합했을 그 말이 희한하게 자연스럽게 들려서 웃겼다.


동생 줄넘기할 때 자꾸 발이 걸리,

담아, 긴장돼서 그래.
아~~~ 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뛰어봐!


이렇게 언니다운 말까지 는 아홉 살이다.




보리는 밖에 나가서 노는 걸 무척 좋아한다.

우리 아파트 단지 놀이터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주민은 아마 보리일 것이다. 누구랑 뭘 하며 그토록 오래 밖에 머무는지 지켜봤더니 주로 동네 동생들이랑 놀아주고 있었다. 어느 날은 어둑해지도록 안 들어오는 보리를 데리러 나가보았다. 이미 나와있던 이웃 동생들의 엄마들 나를 보반색했다. "리엄마! 보리가 동생들이랑 어찌나 잘 놀아주는지 몰라요. 너무 고맙게도요."



보리가 동생들이랑 노는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첫째, 이터에는 동갑인 친구가 없다. 2학년 친구들은 대부분 학원에 갔기 때문이다. 보리는 주 3회 피아노 교습소에 가는 것이 유일한 학원 일정이므로 시간이 아주 많다.

둘째, 동생들과 놀면 리더가 될 수 있다. 제나 게임을 주도하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보리이다. 아무래도 저보다 어린아이들과 놀아주 자신이 원하는 걸 충족시키는 것 같다.

셋째, 집에 있으면 엄마가 자꾸 책 읽자고 공부하자고 귀찮게 한다. 2학년이 되자 학교에서 수시로 단원평가라는 걸 치고 그 결과를 집에 가져오는데(부모님 사인을 받아가야 함), 점수가 늘 60점 대이다. 학교 진도 못 따라가는 건가 싶어서 즘에 집에서 함께 교과서 복습을 하고 있다. 객관적인 나의 관점으로, 보리는 조금 산만한 편이다. 책에 푹 빠져서 읽는 애들도 있던데, 내딸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는 "집중해. 다시. 똑바로 앉아서 다시 읽어봐" 따위의 말을 자주 하게 되고, 그래서인지 딸은 엄마랑 공부하는 걸 딱히 좋아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렇지만 보리는 꽤 성실하다.

매일 하기로 분량의 공부는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해내는 편이다. 국어 영어 동화책 한 줄 필사, 눈높이 영어학습지, 수학 문제집 한 페이지, 국어 문제집 한 페이지, 영어 챕터북 2권 듣고 따라 읽기가 그것이다. 요즘 보리는 자발적으로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위의 공부를 한다. 오후에는 밖에 나가서 놀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하는 초등학생이라니. 언뜻 대단한 것 같지만 어제 쳤다는 수학 단원평가는 또 60점이었다. "수고했어. 어.. 맞힌 문제가 더 많네!"라고 말은 했지만, 살짝 흔들렸을지도 모르는 내 눈빛을 보리 알아챘을까. 등2학년 아이와 함께 "시험 같은 거 없으면 좋겠다"를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얼마 전 집 앞 운동장에서 남자애들과 축구를 하던 보리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에 들어왔다. 넘어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약상자를 들고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보리는 나를 보자 왕-하고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이구, 많이 아프고 놀랬구나"하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보리가 이렇게 아기처럼 목놓아 우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엄마.. 있지.. 나 밖에서는 안 울었어. 사실은 진짜 너무 아파서 울고 싶었는데 꼭꼭 참고 집에까지 왔어.




이렇게 말하는 아홉 살이 애틋해서 나도 눈물이 날뻔했다.

그러고 보면 연년생 동생인 담이는 요즘도 툭하면 울음을 터뜨리는데 보리는 진작부터 그러지 않았다. 아홉 살 소녀는 언젠가부터 속상하거나 화날 때면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다가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식으로 울었다. 슬픈 책이나 장면을 볼 때는 소리 없이 눈물방울만 또르르 흘려보낸다.




사랑에 관한 말을 좋아해서 수집한다.

그중 최근에 정서경 시나리오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있다. 이 말이 너무 충격적으로 와닿아서 내 마음속 어딘가에 꽂힌 것 같다.


사랑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것.


나는 아이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본연의 모습을 펼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주기를 소망한다. 아이에게 더 너그러워져서 더 넉넉한 자리를 내어주고 싶다.

십 년만 있으면 성인이 되어 훨훨 떠나가 버릴지도 모르는 딸이 지금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다. 속눈썹 한올 한올까지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 내가 할 일은 보리를 잘 관찰하여 보리가 되도록 두는 일일 것이다. 더불어 아이가 자신이 존재 그 자체로 귀하다는 걸 끊임없이 알려주는 일일테다.


보리가 열살이 되어도 울음을 참지 않기를 바란다.

내 앞에서는 크게 목놓아 울어도 된다는 걸 언제까지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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