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 Francia Apr 29. 2022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시인의 문장들


  나에게 행복이라는 두는 일생의 관심사이다. 그 말인즉슨, 내가 그 상태에 도달하는 에 자주 실패한다는 뜻이다. 손에 잡힐 것 같다가도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알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까무룩 또 우울해진다.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과 친한 사람들은 정작 행복이라는 말 자체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게 몹시 부럽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들을 관찰하고 탐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행복이라는 단어에 꽤 몰두했었다. 행복한 상태란 뭘까.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고민을 붙들고 그런 책들을 파고들었다.(읽다 보니 종교나 명상 쪽으로 흘러가게 되더라..분명 도움은 된다.) 20대 때 읽었던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30대 초반에 읽었던 모가댓의 <행복을 풀다>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과정은 상이했지만 결론은 일치했다. 행복에도 재능이 필요하다는 것. 나를 둘러싼 소중한 것들을 잘 인식하는 감각 이 그것이다.(물론 알면서도 잘 안된다..)

  

  이 책도 바로 그  행복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메시지가 주는 통찰도 놀랍지만 그것을 표현한 시인의 문장에 사로잡혔다. 시가 아니라 산문인데도 은유 가득하다. 어떤 단락들은 필사하며 반복해서 읽었다. 좋은 문장들을 기록해두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행복은 유한한 삶에서 겪는 무한의 새로운 경험이다. 행복은 기쁨이고 발견이며 향유다. 그것은 정서적 충만으로 겪는 긍정의 순환이고, 깨지지 않는 지복에의 굳건한 믿음이다. 행복은 대상을 향유하는 것이다. 찰나에서 영원을 보고, 그 불가능의 가능성을 엿보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행복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의 향유다.
P.194


우리는 어린 시절보다 어른이 된 뒤 더 불행해졌다. 어렸을 때 우리는 작은 놀이나 성취에 기뻐하고 행복에 겨워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행복해지는 법을 잊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나이가 들면서 행복에의 재능이 고갈되고, 행복보다 불행을 빚는 일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현실과 욕망 사이의 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자주 그 균형 잡기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p.78

  

  시인은 무척 관조적이다. 책에는 저자가 베를린에 머물면서 쓴 글이 다수 있는데, 그곳에서의 일상적 풍광이 생생한 찰나적 시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시인이 거주하는 파주라는 곳의 사계절도 글로서 감각된다. 한겨울 차디찬 파주의 공기가 코끝으로 밀려오는 듯했다. 그 모든 시공간 속에서 자신에게 오롯이 머물렀구나.. 느끼며 나도 홀연히 충만해졌다.


관조는 대상을 넘어, 대상과 연관된 자아의 협소한 영역을 넘어 우리를 저 멀리로 데려간다. 자아가 손을 뻗쳐 만질 수 있는 좁은 영역의 속박에서 벗어나 저 먼 추상과 무한으로 나아가게 이끈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의 표면적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내재된 가치와 의미를 깨닫는 관조의 찰나, 자아는 미적 쾌감과 더불어 그 경계를 확장하며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사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날들이 아무 관조 없이 욕구와 즉물적인 응답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거기에는 기쁨이 깃들 수 없다.
 P.207


  침묵과 독서에 관한 예찬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와닿았다. 내가 어째서 카페나 서점보다 도서관을 그토록 좋아하는지 그가 대신 다 말해주는 듯했다.


독서란 침묵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청 행위다. 그것은 책이 베푸는 침묵의 향연으로 몸을 밀어 넣어 섞고 스미며 상호 침투하는 과정이다. 독서는 내면의 불안과 혼돈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려고 할 때 그 유용성이 빛난다. 독서란 침묵의 밀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더없는 행복으로 바꾸는 행위다.
침묵은 자연 상태에 항상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일깨우는 것은 소리다. 침묵은 자연의 것이고, 소음은 도시의 현상이다. 소음은 침묵을 공격하고 그것을 부서뜨린다. 소음은 침묵의 살해자다. 차라리 소음은 침묵이 부스러진 것, 침묵의 잔해물이다. 자연에서 침묵은 스스로를 평정하고 스스로 태어난다. 자연 상태에서 깨어난 침묵이 젖을 물려 기르는 것은 소리들이다.
침묵은 소리들을 제가 가진 가장 좋은 것들로 부양한다. 소리들은 침묵에서 멀리 나갔다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침묵과 소리는 혈연관계다. 소리가 침묵과 대조를 이룰 때 침묵의 명예와 위엄은 더욱 돋보인다. 침묵은 소리와 소리 사이에 머무는 신성한 파동이다. 세상에 떠도는 모든 소리는 침묵 속에 들어갔다 나옴으로써 비로소 정화될 수가 있다.
도서관, 수도원, 빈 들, 사막은 침묵으로 깊어지는 공간이다. 침묵은 부재하는 존재를 더 또렷하게 드러내면서 공간을 더 넓게, 더 높게 만든다.
P.107


  최근에 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겸허해짐을 느끼는 중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란 상상을 초월할만큼 미약하다는 사실에 아득해진다. 까딱 잘못하면 허무주의로 탈선할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의 생은 너무 비천하고, 우리의 삶은 너무 귀하다. 이 짧은 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삶은 얼마나 짧고 비천하며 슬픈가! 불꽃은 아름답지만 곧 차갑게 식은 재로 변한다. 꽃은 화사하지만 이내 시들고, 달은 둥글게 차올라 빛나지만 곧 야윈다. 인생에서 아름다움은 금세 퇴색하고, 젊음은 빨리 지나가며, 모든 사랑은 시든 꽃이 지듯 사라진다. 곁에 영원히 머무를 것 같던 친구도 언젠가는 떠난다. 우리는 혼자 남아 자기 삶을 견뎌야만 한다. 삶은 행복보다는 견뎌야 할 것, 늘 초극(超)을 재촉하는 그 무엇이다. 우리 삶을 직조하는 씨실과 날실은 불행과 슬픔이다. 우리는 늘 삶이 펼쳐 놓는 비극과 불행에 맞서 싸운다. 그 싸움에 이겨야만 행복은 겨우 한 줌의 안식으로 다가올 뿐이다.
P.286


행복한 이들은 늘 고요하고 여유가 있다. 그들의 마음은 감사와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불행한 이들은 근엄하고 냉소적이다. 그들의 마음은 복잡하고, 까칠하며, 불만과 짜증으로 가득 차 있다. 행복한 이들은 행복의 강박증에 눌리지 않고, 그저 어리석음과 유행을 좇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자기 인생에 무엇을 더하는 대신 덜어내려고 애쓴다. "좋은 삶은 대단한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고, 멍청함이나 어리석음, 유행 따르기를 피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 절제하는 것'이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들은 내재적 가치를 추구한다. 내재적 가치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우정과 사랑, 충만한 자아, 영혼의 성장, 가족에게 느끼는 친밀함,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의 좋은 관계와 밀접한 그 무엇이다.
P.193


마지막으로,
저 혼자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자는 메시지. 우리 아이들에게도 꼭 전해주고 싶은 말들이라 캡처해두었다.

공감과 연민도 결국 행복을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닐까.

악의는 대부분 무지에서 온다고 했다. 모르면 서로 알려주고 같이 배워나갈 일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행복과 그만큼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혼자만 불행을 회피하려고 전전긍긍하고, 혼자만 행복해지려고 아등바등 고투하는 것은 비루한 짓이다. 먼 곳에서 사는 이들의 고난과 고통을 품고 함께 아파해야 한다. 우리의 안락한 잠과 따뜻한 밥은 누군가 노동하고 수고한 대가다. 누군가 불행에 빠져 허덕인다면 우리는 그 책임의 일부를 나눠질 생각을 가져야 한다. 불의와 폭력에 눌리고 신음하는 사람들, 난민들과 이주 노동자들과 노숙자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있어야만 한다. 마흐무드 다르위시라는 시인은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생각하라”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침밥을 먹을 때 휑한 눈으로 굶주린 채 망연자실한 사람들, 우리가 아늑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 창공의 별을 보며 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는 여행자들과 집 없이 차가운 지하도 바닥에 골판지를 깔고 잠드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행복은 죄악일 뿐이다.
p.77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