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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Apr 26. 2022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그 삶의 어느 지점까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주인공은 2녀 중 장녀, 미혼, 30대의 끝자락, 가사 노동자, 이혼한 여동생의 아이들(4세, 6세)의 돌봄을 자처한 사람, 조카 양육을 위해 자신의 연인과 이별한 사람, 시를 필사하는 사람, 자신의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다.


  육아와 가사 노동, 그것을 둘러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허덕대는 기혼 여성이 극심한 자아 고갈을 느끼게 된다는 서사는 어느새 익숙하다. 들여다보면, 세상의 모든 기혼여성들이 ‘결혼’이라는 선택을 한 배경에는 그들의 숫자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할 터. 그 사연들은 일견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 비주류에 속한다는 것, 주위의 시선, 각종 편견과 불평등, 그로 인한 압박과 불안감에 초연하기란 쉽지 않기에. 그런 것에 이입하다 보면 우리 사회에서 미혼여성이 느낄 법한 존재적 가치 또한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미혼여성이고, 부모와 동생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다. 화근이라면 혹은 문제라면 그가 태어나서부터 쭉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자기 것을 먼저 내세우지 않는 사람. 가족을 위해 내 몫을 기꺼이 내어놓는 사람. 가족들은 늘 그래 왔듯 그의 희생을 당연히 여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의 다채로운 무게감과 가족 구성원 개개인을 보살피는 집안일의 고단함으로 인해 ‘잠은 언제나 득달같이 달려’ 든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지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심신의 여유가 도저히 없어서 헤어진 상태이다. 시를 쓰고 싶은 주인공은 몇 년째 글을 짓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어쩌면 자신의 존재가 더욱 절실할 그 시점에 그는 독립을 선언한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 내가 첫 딸을 낳았을 때, 엄마가 나한테 웃자고 좋자고 한 말이다. 이런 말을 아직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살림 밑천’으로 소모되었을 어떤 이들의 삶을 떠올리며 진저리 쳤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여동생은 비교적 고소득자라서 경제적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으로 출근하고, 어린아이들은 이모인 주인공의 손에 맡겨진다. 부모님은 결혼에 실패한 둘째 딸을 가엾이 여기며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 한다. 돌도 안된 아기가 한밤중에 깨서 울면 주인공을 깨우면서, 둘째는 출근해서 돈 벌어올 사람이니 밤에 푹 자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에서 작가는 돌봄과 가사 노동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사사로운 차원의 것들이 복합적으로 글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건 노동 그 자체라기보다는 타인이 그 행위를 인식하는 방식인 듯하다. 집에서 쉬어가며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일, 구성원 중 벌이가 적은 사람이 마땅히 할 일, 금전적 대가를 바라면 이상한 일.이라는 인식들.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나를 위한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긴 경험은 어린 시절 각자의 부모라는 존재로 충분하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당신의 것을 내려놓았다면, 감사함을 느끼고 그 마음을 기꺼이 표현하고 전달할 일이다. 당신의 희생과 당신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중요한 걸 나는 너무 늦게 인식했고, 그러고도 자주 잊어버리고, 이런 책을 읽으면서 다시 깨닫곤 한다. 좀 덜 부끄럽고 싶어서 계속 읽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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