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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un 08. 2022

말하고 싶은 욕구, <쓰는 기분>

이파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을 가을이라 부른다

박연준 시인의 ‘쓰는 기분’이라는 산문집을 소개하고 싶어요. (혹시 이미 읽고 좋으셨다면.. 두 손 맞잡고 이야기 나누고 싶을 만큼 반갑고요!)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문학적이고 아름다운 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좋은 글이란 읽고 나면 마음이 동해져서, 뭔가를 쓰고 싶어지게 하는 것이에요. 이 책은 그런 글들의 모음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자 다른 서평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저는 시인이 쓴 산문을 좋아합니다. 문학적 감수성을 사랑하고 동경하고 좇으면서도, '문학의 정수'인 시를 읽는 것이 당최 어려운 거예요. 어떤 시는 나에게 당도한 해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느껴졌어요. 감성이 부족한 것이지요. 부끄럽게도, 어릴 때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아는 척했었어요. 문학평론가가 쓴 작품 해설 같은 걸 읽고 내 생각인 양 떠들면서요. 시는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는데, 말로 구체화시키고 형상화하려고 너무 애썼나 봐요. 요즘에도 가끔 시를 읽지만, 굳이 해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껴요. 와닿는 말도 있고, 여전히 의미를 모르겠는 말도 있어요. 하지만 시인이 쓴 산문은 시보다 한 겹 더 친절해서, 감수성 부족한 저는 이번에도 깊은 충족감을 얻었습니다.


말하고 싶은 욕구가 쓰는 일의 원동력’이라는 문장을 읽고, 내가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 기간은 내가 너무 지쳐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땐 주야장천 소설책을 읽고,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요즘은 또 뭔가를 마구마구 쓰고 싶어 집니다. 그게 뭐든, 잘 쓰든 못쓰든,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창작행위에 있다’라는 문장을 곱씹으며, 비루한 나의 글쓰기에 용기를 얻습니다. ‘어떻게 보일까’를 지나치게 염두에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쓰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고 싶어요. 지금 이 순간처럼요. 우리는 모두 글쓰기를 사랑하니까, 그것이 재밌으니까, 그것을 통해 뭔가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뭔가를 떨쳐내기도 하고, 그로 인해 도약하기도 하니까, 글을 쓰는 것 아닐까요.




나는 읽을 때 묶여있다가 쓸 때 해방된다. 진정한 자유는 창작 행위에 있다.
글을 잘 쓰는 작가에게도 한 글자도 못 쓸 것 같은 순간이 온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글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글뿐만일까. 그게 뭐든 잘해야 한다는 부담. 스스로 전문가라는 자의식, 기대에 부응해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욕망은 일을 진행하기 어렵게 한다. 때때로 내가 좋이 위에서 서성인다면, 백지를 피해 도망 다니려 한다면, 엄청나게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욕심 탓일 게다. 얼토당토않지! 엄청나게 좋은 글이라니? 바보 같긴. 누구도 내게 '최선의 것'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최선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던 어느 날, 나는 구원을 받았다. 볼테르의 이 문장을 읽은 거다.
‘최선은 선의 적이다. The best is enemy of the good.’
얼마나 날카로운 인식인가! 최선 best은 모든 선 good을 속박한다. 그대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데, 최고로 좋은 상태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거나 시작도 못하는 일, 바보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의식 과잉 상태다.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정신도 좋지만, 사실 그런 마음은 창작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p.125



필요한 것은 '말하고 싶은 욕구'다. 쓴다는 것은 말하고 싶은 욕구의 대체 행동, 능동적인 말하기다. 쓰기 싫을 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다. 마감이 코앞에 있는데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으면 괴롭다. 그땐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누가(대체로 편집자가) 내 방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한다.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조르고, 조른다고 상상한다. 그가 문 밖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맞으며, 비를 맞으며 앉아있다고 상상한다. ‘좋아, 정 그렇다면……' 나는 할 수 없이 시작한다. 상상! 이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해온 운동이다. 영혼의 줄넘기랄까. 믿어야 한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몹시 듣고 싶어 한다고, 내겐 중요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p.120



로맹 가리의 소설 『흰 개』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책을 쓸 때는, 이를테면 전쟁의 처참함에 대해 쓸 때는 처참함을 고발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떨어내려고 쓰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울었다. 아름다운 문장은 독자를 감동하게 만들지만, 정확한 문장은 독자를 상처받게 한다. 살리기 위해 내는 상처다. '그 장면'을 쓰려할 때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동요, 허기, 절박함, 떨림, 슬픔의 이유를 알았다. 고발이 아니라, 표현 욕구가 아니라, 나는 떨어내고 싶어서 쓰고 싶은 거다. 쓴다는 건 벗어나는 일, 변태 후 다른 페이지로 이동하는 일이다.
p.159



내가 상정하는 독자는 언제나 '잘 보이고 싶은, 모르는 사람'이다. 독자를 아는 사람으로 상정하지 않는 건 아는 사람에겐 해야 할 말을 생략하거나 필요 없는 말을 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글에서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대충 분위기만 피우다 끝내면 속 빈 강정이 되기 쉽다. 필요 없는 말을 하게 되면 사변적이고 꾀죄죄한 글이 된다. 둘 다 위험하지만 후자가 더 위험하다. 일기와 에세이는 여기에서 가름 난다. 일기를 잘 쓰면 수기가 되지만, 이 또한 에세이는 아니다. 에세이는 생각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지만 수기는 읽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다. 수기는 ‘나’가 주인인 글이고, 에세이는 ‘독자'가 주인인 글이다. 일기는? 진짜 일기는 독자가 없다.
p.113



에세이를 쓸 때 '어떻게 보일까'를 지나치게 염두에 두면 망한다. 수영 선수가 자신의 영법이 어떻게 보일까 신경 쓰며 대회에 참가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면? 대회에서 탈락하겠지! 물에 들어갔다면 생각을 버린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과 속도를 느끼면서. 물 밖의 일은 알 바 아니란 듯이 페소아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그걸 사랑해서, 그래서 사랑하는 것, 그게 글쓰기의 유일한 방법이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순진함이요, 모든 순진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
너무 많이 생각하면 망한다. 그냥 해야 한다. 축구 선수가 공을 몰고 가 슛을 하듯이, 단순하게, 밖을 생각하면 솔직해질 수 없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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